진영의 <happy Island>展 전시장면 및 작가와의 만남

 




 나의 그림에는 앵무새머리를 가진 인간이 등장한다. 이 앵무새 인간은 작업 초창기부터 계속 등장해왔다. 시리즈 작업을 하며 점차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는 식으로 진행을 해왔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따라하는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모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앵무새처럼 말만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현대인들의 정보를 주고받고 그것을 따라 하는 과정이 모방과 밀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앵무새 사람들은 서로를 따라하고 있다.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 모방만을 반복하는 앵무새 사람을 그리며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또한, 나는 작품을 진행하며 작품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중들의 시각을 사로잡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품의 비주얼적인 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미지로 다가가길 바랐다. 나 스스로가 유머러스함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줄 공원의 이미지는 공간제약이 사각의 틀로서 드러난다. 도시 삶에 있어서 공원이라는 부분이 자연적인 산과 같은 이미지라고 보기 보다는 공간제역이 명확한 섬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나의 경험에 비춰진 이야기지만, 육아를 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장소에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공원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즐거운 장소로 다가오곤 했는데, 공원에 가면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어울리고 노는 이미지가 공원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도 있다.  



Q. 일부 작품에서 앵무새 인간이 아닌 부엉이가 등장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전 작업에서 호박이라는 소재와 함께 앵무새 인간을 배치했었다. 그것 역시 굉장히 행복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작품이 더욱 행복하게 발전을 하더라.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춰 작업을 하듯, 나 역시 경험에 비추어 아이가 인생에서 참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부엉이 역시 아이가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작품 속에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부엉이는 밤에만 활동하지 않는가. 그래서 배경이 밤이 되었다. 낮과 극명히 비교되는 것은, 낮에는 행복하게 놀다가 밤에 찾아간 공원은 스산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스산하게 느껴지며 앞을 찾을 수 없을 때, 앵무새 인간들이 보물을 찾아 헤맨다. <<treasure hunter>, acrylic on canvas, 72.7×90.9cm, 2017)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항상 다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다닌다고 생각하여 이런 연출을 하게 됐다.


 
Q. 나무의 크기가 매우 크게 묘사되어 있고, 그에 비해 앵무새 인간은 매우 작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공원의 자연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렇게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이 자연보다 더 작은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자연을 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도록 연출했다. 내 작업을 보면 항상 앵무새가 작게 나온다. 게다가 이들은 군중으로 나오기에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모습이 더욱 도드라지게 된다.

Q. 앵무새 인간의 성별이 궁금하다.

전부터 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앵무새 사람에게 사실 특정한 성별을 주지는 않았다. 그냥 앵무새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할 뿐이다. 이전에는 마트에서 카트만 보는 사람, 빈 강의실의 사람 등 직접적인 상황묘사를 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앵무새 인간들에게 행복을 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상의 색이 점점 밝아지게 됐다.


 
Q.작가 본인은 유머러스함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한 느낌도 든다. 제약된 공간안에 있는 앵무새는 결국 새장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어노는 것을 보며 즐겁다고 했지만, 그것은 반대로 이 공간 밖에서는 뛰어 노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공원 밖의 앵무새 인간들이 궁금하다.

삶은 항상 양면이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것이 공존한다고 할까. 이렇게 행복한 상황이 있다면, 반대에 속하는 밤이라던지 힘든 생활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내면에 녹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 공간 밖에서의 앵무새 인간들은 어떻게 지낼지 상상할 수 있도록 고행스러운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앵무새에게 자신을 투영하기 시작하더라. 물론, 이 앵무새 인간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한 작품들이었다. 작품 속 앵무새들은 대개 한방향을 보며 모방을 하고있지만, 문득 다른 방향을 본다던지 관객을 응시하는 앵무새들이 있다. 그것은 즐거운 상황을 즐기는 와중에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문득 깨닫는 순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굉장히 직접적인 표현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