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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대안공간눈 신진작가지원 특별기획전
<Knock>展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체성의 전쟁

수원의 대안공간 눈 예술공간 봄에서 열리고 있는 Knock 전은 경기권의 4개 대학(경기대, 협성대, 수원대, 경희대)에서 올해에 졸업하는 작가 지망생 중 14명을 선발한 신진 작가 지원전이다. 한해에 쏟아지는 미대 졸업생들의 숫자를 생각할 때, 이 전시의 참여자들은 첫 단추를 잘 꿴 것으로 생각된다. 기회란 우연 반 필연 반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전시 제목 ‘노크’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것을 상징할 때, 기성작가의 작품 발표는 물론 신진작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해온 지역의 유망한 대안공간에서의 전시는 앞으로 그들이 수없이 열고 들어가야 할 많은 문들 중의 가장 근사한 것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들 앞에 놓인 문들이 많음을 고난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중간에 주저앉지 않은 이상, 어차피 그 문의 끝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여러 방으로 나뉘어진 전시공간은 14명의 작품 세계를 각각의 방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 방에 있는 각각의 작품 또한 하나의 문이다. 미술작품의 보편적 틀이었던 액자가 창문이나 문, 거울 같은 위상을 가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각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는 특정 주제 또한 일종의 문이다. 하나의 주제를 파다보면 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다. 만약 그것이 막다른 길목이라면, 작가는 자신이 직접 그린 문을 통해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정해진 똑같은 길을 더 빨리 지나가기 위해 비슷한 방식으로 경쟁한다면, 작가로서는 그 스스로 만든 문을 통해 나아가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업이란 매력적이면서도 어렵다. 작가로서의 길에는 실제의 문과 허구의 문들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작업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문 속의 또 다른 문들이 연속되는 미로이다. 거기에서는 단기적인 전망 아래 누구나 원하는 하나의 길 보다는, 우회하면서 자기만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우직함이 더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다.

관객 또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세계의 탐색하는 마음으로 노크를 하게 된다. 노크 소리는 여기와 저기를 나누는 경계인 문턱에서의 진입 신호들이다. 1, 2 전시실에 나뉘어 열린, 참여 작가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작품들을 보면, 이 새내기 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명시적인, 또는 암시적인 자화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주체와 타자의 관계,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본 사회에 대한 비판까지 다양한 층위가 있다. 작가, 아니 작가가 아니더라도 정체성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문제이다. 그러나 기계문명의 시대에 정체성은 어느 시대보다도 위기에 처해있다. 후기 구조주의를 비롯한 현대 철학은 그 문제를 이미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으며, 현대 예술은 지진계처럼 그 위기를 기록해 왔다. 대답하기 힘들어도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초월하고 싶어도 초월할 수 없는 지속적으로 회귀하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물음은 저조한 취업률 덕분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는 인문, 사회, 예술 계열 전공자들만의 한가로운 물음이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는 이 전시의 참여자들처럼 새로운 문 앞에서 노크를 하는 신참자들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긴박하다. 뿔뿔이 흩어져 추상적 구조의 그물망 속에 매달려 있는 형국인 현대인은 그 좌표계 속에서 보다 유리한 입지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자연은 물론 전통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던 근대인에게 강한 정체성은 무엇보다 필요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문장에 등장하는 근대적 자의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계몽적이고 민주적인 목적과 달리, 불평등한 사회는 정체성을 똑같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령 ‘나는 작가다’라고 믿고 싶지만, 우리사회가 작가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가. 흔히 사회에서 경험하듯이 누구의 정체성은 더욱 중요하고 누구의 정체성은 그렇지 않다. 허울 좋은 명분아래 누군가의 사익에 철저히 이용됐던 ‘국정기조’인 ‘융복합’ 정책들을 떠올려 보라.

그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자국 중심주의가 발흥하여 타자 혐오증적인 기색마저 보이는 요즈음에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경쟁사회에서는 타인이 가진 심신의 자산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상대를 무화시키는 만큼 자신은 커진다고 생각하는 정당하지 못한 관례들이 팽배하다. 누군가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권위 뒤에 숨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검증 자체로부터 초월하지만, 누군가는 매순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요구받는다. 정체성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부터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권력이 개입된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인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의 환상과 달리, 완전한 바깥은 없다. 낙오자 또는 주변인은 제 2, 제 3의...의 리그에 해당하는 또 다른 그물망에 속해 있을 뿐이다. 물론 자신이 속한 그물망에서 또 다른 게임의 규칙을 제시하면서 텍스트를 짜나가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풍자적인 초상; 김이슬, 허민준, 김기영, 정성희, 이유진

김이슬의 작품 [현실비판인가 자기비하인가]는 진주목걸이에 숨이 막혀있는 표정의 자화상이다. 자화상의 바탕 면에 깔린 타일들은 매우 화려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항목들 안에서 답을 찍어야 하는 듯한 답답함이 발견된다. 또 다른 작품은 정해진 틀 안에서 날아가지 못한 풍선을 자신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자화상 모양의 풍선을 가두고 있는 틀도 자신이 더 확장되거나 상승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다. 그녀의 작품은 게임의 새로운 참여자를 더욱 가혹하게 옥죄는 기성 시스템을 비판한다.

허민준은 작품 [틀]에서 말 그대로 틀에 박힌 사람을 표현한다. 그는 자신만 틀에 박혀있을 뿐 아니라, 타자에게도 이를 강요한다. 누군가를 가리키며 공격적인 말을 내뿜는 얼굴 표정이 그렇다. 신체의 많은 부위 중 말하는 입이 강조된 것은 틀이라는 것이 주로 언어를 통해 작동됨을 알려준다. 물론 상대를 향한 언어의 귀착지는 정신 뿐 아니라, 몸의 강제 및 조절이다. [틀 품종]이라는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인간의 욕망에 맞춰 개량되는 틀에 박힌 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인간/자연에게 일어나는 일이 자연/인간에게도 일어남을 알려준다.

김기영은 도마뱀 얼굴과 꼬리를 가진 반인반수의 괴물을 통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쉽게 자포자기하는 행태를 풍자한다. 위험에 닥쳤을 때 도마뱀은 꼬리를 자르는데, 이러한 자절(自切, autotomy)을 발음이 비슷한 좌절(挫折)과 연계시키는 것이다. 꼬리는 쉽게 재생이 되므로 도마뱀의 자절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연의 섭리인 셈이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 인간은 자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자연의 법칙 보다 불공정한 인간의 규칙을 생각할 때, 자연과 접 붙어있는 작품 속 인간은 나름대로 낙관적으로 보인다.

정성희의 작품 [너와 나, 그리고 비둘기의 물음]은 박제를 사용한 비둘기의 추락 장면이 매우 리얼하다. 그러나 관객 발치에 설치된 비둘기보다 눈이 더 가는 것은 눈높이에 매달린 하얀 덩어리들이다. 깃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깃털과 나뭇잎의 중간이다. 특히 낙엽은 끝이 아니라 재생을 상징해왔다. 식물은 그 이듬해를 약속하며, 세계관에 따라서는 동물 또한 거듭되는 윤회를 통해 그렇게 한다. 깃털을 날리며 추락하는 새 또한 다시 조합되어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날 자연의 원자들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이유진은 동화에 나올법한 아름다운 성을 그린다. 그녀는 실체만큼이나 그림자를 공들여 표현한다. 물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성은 이상적인 자아에 대한 소망을 투사한다. 자아는 집으로 표상되곤 하니, 집의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은 이상적인 자아에 대한 상이다. 서양식 동화를 보고 자의식을 형성한 듯 유럽식 성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러나 그곳으로 건너갈 수 없는 동떨어진 섬 같은 집/자아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이 고독한 성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는 자기가 외치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침을 보여준다.
 

주체와 타자 간의 대화; 송주화, 박희인, 최인영, 박지원

송주화는 작품 [어떤 분수]에서 뱀과 함께하는 여성을 분수로 표현했다. 무의식을 상징하기에 뱀이나 용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원초적 혼돈이라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승화하는 것이라 고 보는 인류학적 상상력이 있다. 송주화의 작품에서 뱀은 그 무의식의 층위에 깔려 있지만, 언제든 분수처럼 솟아올라 의식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또 다른 작품 [자아의 공간]에서 송주화는 여러 재료들로 얼기설기 엮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것은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 그 사이의 빈 공백에서 생성되는 이질적 힘들을 강조한다.

박희인은 장지에 채색으로 솜씨 있게 그린 개들을 통해 자아에 개입되는 타자의 시선을 표현한다. 뻥 뚫린 화이트큐브가 아닌 전시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작품 간에도 작동하는 시선의 교차가 충분히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의도가 전달되기는 했다. 인간과 친한 개는 사회적 속성을 가진다. 작품 속, 그리고 작품 간 개들은 누가 제일 우두머리인가를 판가름하는 시선을 날리며 전전긍긍한다. 주체를 중심에 놓는 근대의 강한 자아상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조율되는 주체를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사회적 의식의 출발이기도 하다.

최인영은 작품 속에 자기가 영향을 받았던 예술작품이나, 잡지의 사진 같은 대중문화를 등장시킨다. 이러한 등장은 명시적이기도 하고 암시적이기도 하다. 자신이 영향을 받은 모든 것을 모으면 그것은 또 다른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집합이 바로 자신이다. 작품 속에는 여러 상황, 또는 인물로 변장한 자신이 나오는데, 그들은 일종의 분신이다. 가령 프리다 칼로에 관한 책을 보는 작가는 프리다 칼로 식의 복장을 한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같은 옷을 입고 무리지어 나오는 분열적 인물들 역시 전염이나 분신이라는 주제가 발견된다.

박지원은 서로 연결되어 늘어뜨린 실을 통해 인연을 표현한다. 자아를 상징하는 둥근 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크기와 위치가 다른 원과 원의 만남은 자아와 또 다른 자아, 즉 타자와의 만남이다. 전시실의 벽을 타고 연결되는 하나의 거대한 설치작품에 포함되는 초기 작품제목이 [만남]이다. 물론 거기에는 얽히고설킨 수월하지 않은 만남도 존재한다. 색이 없는 이 작품은 실체 보다는 관계망 그 자체를 강조한다. 관계가 실체인 것이다. 연결은 작품과 작품 뿐 아니라, 공간과 공간에도 적용되며 확장성을 가진다.

 

나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발언 ; 김지언, 김명수, 이예니, 정현영, 유상아 

김지언은 파워와 스피드를 상징하는 나이키 로고가 박힌 운동화와 그 이미지를 병치한다. 운동화는 이동수단이지만 그 자체로도 물신적인 사물/상품이다. 그것은 실물 옆의 이미지처럼 허상만으로도 효과를 발휘한다. 또 다른 작품은 대못을 용접해 만든 하이힐, 모자, 가방이다. 이 물신숭배적 물건들은 그 일부가 소유자를 은유한다. 그림 속 대중들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듯 분주하게 이동한다. 흐릿하게 처리된 군중들은 정작 로고가 박힌 운동화가 실어 나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략한다. 합리는 비합리로 전환된다.

김명수는 자석과 MDF합판을 이용하여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지는 현대사회를 표현한다. 구성주의적 어법을 활용하는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위상이 초라하다. 인간이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은 기하학적으로 쌓은 흡착판들 안에 손톱만한 인체 모형물들을 하나씩 박아놓았다. 미술사에서 구성주의, 약간은 다르지만 사상사에서 구조주의는 인간 보다는 구성이나 구조를 중시한다. 자연과 환경은 물론 인간 또한 구조의 결과물일 따름이다. 인간은 구조를 만들지만, 구조 또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후자의 경향은 더욱 강세다.

이예니
의 작품 [통일을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는 우리사회의 당면과제인 통일문제를 다룬다. 작품으로 제시되는 해법은 각각 유리병 안에 갇혀있는 주체의 틀을 깨고 나온 후, 그 주체를 형성하고 있는 흙으로 되돌아가 서로 만나 새싹을 틔우는 것이다.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이항대립의 원리는 결국 다르지 않은 두 세력이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세운다. 반대가 아닌데 반대라고 생각되면서 지탱되는 논리는 부조리함을 지속시킨다. 작가의 통일에 대한 해법은 주체의 해체를 통해 다르지 않음(不二)을 확인하는 것이다.

‘아담한 풍치나 높은 절개’라는 뜻을 가진 작품 [雅致高節]을 포함한 정현영의 고풍스러운 작품들은 오늘날 가장 타자화 된 것들 중의 하나가 전통임을 알려준다. 특히 한국화과 출신들은 전통과 현대의 관계를 포함한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민감하다. 현대 자본주의 문화를 특징짓는 강력한 스펙터클아래 현대미술을 포함한 모든 시각적 전통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지배적 코드로부터 자유롭고 독특함과 이질성의 산실로서의 명맥을 이어간다. 전통을 비롯한 주변화된 것들은 그 언제고 텅 빈 중심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상아의 [柳토피아]는 지금여기에서 당면한 골치 아픈 문제로부터 초월한 자기만의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기에, 유상아의 작품은 토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붕 떠 있다. 또 다른 작품군 [emergency box]는 여행과 치유를 중첩시킨다. 두 작품군을 결합하면 유상아는 유토피아로의 여행을 추구하고 그것을 치유로 여긴다. 또한 작가는 방 한구석에 우주 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탈주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여지가 없다면 진부하면서도 가혹한 이 세상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