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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현상의 불안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룹 ‘Half n Half’는 홍익대 회화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작가 5인의 모임으로, 각자의 논문 주제를 전시 테마로 매해 그룹전을 열고 있다. 매해 한 작가의 주제를 나머지 4인이 자기 스타일대로 구현하며, 공동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각자의 작업이자 논문의 주제이기에 심도 있게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제를 공유하고 참고문헌을 같이 읽고 토론하며, 공동 작업까지 함께 전시하는 방식은 요즘 학생들에게 팽배해 있다는 개인주의를 불식하고, 타자와 대화하는 대안의 방식으로 눈길을 끈다. 특히 이번 전시의 주제인 ‘불안’은 타자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그룹전의 주제로 다가온다. 타자와 나의 관계는 밀접하다. 타자는 주체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타자들과의 공동 작업은 주체 내부의 타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자 제이 그린버그와 스테판 밋첼이 함께 쓴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고립과 공허함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타자를 자신의 일부로 경험한다.

이 전시의 개인작업과 공동 작업에는 타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상상과 공감적 탐구가 있다.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타자는 심리학 뿐 아니라, 예술의 주요 주제이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타자성은 우리 모두가 의존하고 있으며 부정적인 범주에 의해서만 개념화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합리적인 세계에서 타자성은 이국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 미친것이거나 악한 것으로 밖에는 알려질 수도 재현될 수도 없다. 타자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합리성이 느슨해지는 영역이다. ‘Half n Half’라는 그룹명도 나머지 반을 타자에게 열어 놓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개인주의도 전체주의도 아닌, 각자이면서도 함께 일 수 있는 다중(多衆)의 시대와도 조응한다. 특히 그것이 단순히 학생-작가들이 모여 진도 나가듯이 학습하는 수준을 넘어서, 전시의 형태로 완성되는 점은 당면 주제를 체화할 수 있는 계기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일방적으로 입력되어 머릿속이나 입안에서 맴맴 돌기만 하는 주제가 무슨 소용인가. 정보 범람의 시대에 일반적 주제는 누구든지 찾아내고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어떤 주제를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작가에게 작품이라는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언어로 보편적인 주제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한 주제가 작품화되었다함은, 그 주제나 의식 뿐 아니라 몸과 무의식을 통과했다는 것을 말한다. 작품이라는 구체적 증거 앞에서 말과 사물의 괴리는 줄어든다. 이미 ‘생명’(김태연의 주제)을 내용으로 3번의 그룹전을 열었고, 이번에 대안 공간 눈에서의 ‘불안의 시작’전은 ‘불안’(소수빈의 주제)을 내용으로 한 첫 전시이다. 그룹원의 평균 나이가 30대 중반이니 만큼, 불안은 저 멀리에 있는 주제는 아니리라.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제대로 안하고 있으면 더더욱 불안한 나이 대 아닌가.

불안은 무한정 증식되고 빠르게 전염된다. 증식과 전염은 생산이나 소통과 개념과 달리 제어할 수 없다. 불안은 이러한 제어불가능성에서 온다. 전시장 하나를 온전히 채운 공동 작업에서는 그러한 불안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 작품들은 단자처럼 각자의 세계이면서, 그 여러 세계들이 어우러진다. 한쪽 벽에는 정사각형 크기의 종이에 무채색으로 이미지를 채운 120여장의 작품이 죽 붙어있다. 네 귀퉁이를 5cm씩 남겨놓아 연결점을 마련한다. 비워 놓은 네 귀퉁이는 각각의 세계를 또 다른 각각의 세계와 연결 짓는 접속의 지점들이다. 각자 칸막이 처진 방들은 수직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연결망을 가진다. 그것들은 현재 점유하고 있는 벽면을 넘어서 무한 증식할 것 같은 기세다. 다른 벽면은 둥근 모양의 단자들이 각자의 세계를 담고 벽면을 표류한다. 세포분열을 마친 것들이 원으로 상징되는 좀 더 자족적인 우주를 이루고 홀씨처럼 세상을 떠도는 풍경이다. 미지의 존재들은 장차 무엇을 만날 것이며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 그것들은 자유로운만큼이나 고독하고, 기대감이 있는 만큼이나 불안하다.

그들의 작품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너무 붙어있는 것도 불안하고, 홀로 떠도는 것도 불안함을 알려준다. 침해나 고립 모두 괴로운 일이다. 작가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존재들은 타자와의 적정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를 고민한다. 불안이라는 심리적인 주제는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요구한다. 불안은 항상성과 안전감이 위협받을 때 발생한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항상성의 원리를 통해 자극을 가능한 한 제로 상태에 가깝게 유지하는 것이 정신적 기구의 목적이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고요함은 즐거운 것이고 흥분은 불쾌한 것이다. 자극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항상성의 원리는 인간 행동의 중심적인 동기로 남아있다. 물론 이러한 항상성의 우위는 지루함을 낳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자극이 더 쾌락을 준다. 위험한 놀이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환기시킬 뿐이다. 중독성이 있는 자극의 경우 주체가 의존하는 자극원이 사라지면 평상심조차 유지되기 힘들다.

일상의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한 자극 강도의 강화는 이런 저런 소비를 부추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런저런 자극에 탐닉하던 방탕아가 종교에 귀의한다는 줄거리는 고전적 인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이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대목은 안전이다. 특히 현대와 같은 ‘위험사회’ 속에서 안전에 대한 의지는 강력하다. 안전을 위해 만족은 포기되기도 한다. 정신분석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환상을 가짐으로써 삶에서 만나는 불안을 잊으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전은 상당부분 돈으로 확보된다. 안전은 소중한 자기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전만이 우선시될 때, 그 때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특권, 지위, 자신을 자격이 있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자만심일 뿐이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타자로부터의 인정과 지지를 얻지 못했을 때 인간은 불안해 진다.

정신분석학은 불안감을 상쇄하기 위한 강박적 행동의 하나로 반복을 든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가 손자의 실타래 던지기 놀이를 보고 깨달은 원리를 설명한다. 어머니 없이 혼자 집에 남아 있는 아이는 줄에 매달린 작은 장난감을 던지고 나서 그것을 다시 잡아당기는 반복적 행동을 한다. 아이는 실타래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관계를 어머니의 사라짐과 나타남에 대한 자신의 경험으로 재창조함으로서, 불안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둔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자아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불안을 신호로 사용한다. 위험한 상황은 표면상 외부 사건에 의해 촉발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본능의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포와 달리, 뚜렷한 대상을 가지지 않는 불안에는 불확실한 중심을 공전하는 반복이 있다. 이 전시에서 공동작품 뿐 아니라, 각자의 작품 속에 반복이라는 방식은 많이 발견된다. 반대로, 좋았던 경험도 반복된다. 그것은 마치 꿈처럼 ‘이전의 만족스런 상황이 현실이나 환상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프로이트)을 말한다.

창과 벽을 타고 굼실대며 움직이는 듯한 김태연의 작품은 유전자 단위의 미시세계로부터 꿈틀대는 불안을 표현한다. 정신분석학은 인간 존재의 탄생 자체의 사건을 불안의 원천으로 보고 있으니 만큼, 유성생식을 하는 두 이질적 타자가 얽혀들어 종을 재생산하는 차원부터 불안은 내재할 것이다. 경계를 넘나들며 꿈틀대는 형상들은 경계를 유지함으로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개체의 존재방식을 위반한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전염병들은 타자를 동일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오게 했다. 그러나 동일자와 타자는 서로 외재적인 것이 아니다. 동일자 내부의 타자가 활성화 되는가의 여부가 문제이다. 작품 [정보를 인식하고 전달한다]는 유전자 또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른어른하는 표면 무늬가 다시한번 더 복잡한 굴곡 면을 형성하는 작품들은 동일자라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동일자와 타자간의 역동적 과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번 전시 주제의 제안자인 소수빈의 작품은 식물의 씨앗주머니 형상이 등장한다. 볼풀 공같은 색색의 둥근 단위들로 채워진 화면들은 그 주머니에서 생산된 산물 같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반복적 이미지에 대해서 ‘신체의 반복행동을 통한 선의 반복’, ‘병치와 중첩을 통한 점의 반복’, ‘증식과 분열을 통한 세포 이미지의 반복’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반복들은 불안의 징후이자 결과로도 해석된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경험의 온전성과 전체성을 스스로 유지하지 못할 때, 또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분열하는 경우를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좋은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나쁜 대상과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킨다고 설명한다. 소수빈의 작품에서 식물도감 같은 명확성과 통통 튀며 뛰노는 듯한 색색의 입자들이 보여주는 경쾌함의 결합은, 분열이 소외의 증후이지만 동시에 소외를 극복하려는 기제임을 알려준다.

동물의 해골에서 자라난 풀에서 돈다발이 열리는 구영웅의 작품 [the myth of capitalism]은 근대적 계몽이 몰아냈다고 여겨지는 신화가 다시 등장한다. 다른 작품에서 목이 잘린 신화적 인물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이중 난선형의 유전자 구조를 통과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과정은 상징적 우주 속에서 괴물이 우글거리던 고대와 현대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려준다. 현대과학과 기술은 온전한 개체가 아닌, 한 방울의 피, 세포 하나에서 새로운 개체를 창조할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괴물들이 실험실이라는 중성적 공간을 뛰쳐나와 자본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질주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화적 도상과 현대과학의 도상을 병치시키는 작품들은 기괴하다. 프로이트는[토템과 터부]에서, ‘종족적이거나 개인적인 진화과정에서 억압되어야 했거나 극복되어야 했던 원초적인 정령숭배, 또는 유아기의 나르시시즘과 같은 마음의 초기상태의 회귀’가 기괴함을 낳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장인희는 미러 페트 필름을 인간 형상들로 오려내어 다양하게 조합한다. 그것들은 여러 포즈를 취한 인간들의 실루엣을 순간 포착한 장면 같으면서, 퍼즐처럼 짜 맞춰진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울은 실제가 아닌 상상을 비추는 장치로 간주된다. 거울 앞의 주체를 가상적으로 통합하는 거울은 언제든 주체를 다시 분열시킬 수 있다. 장인희의 작품에서 인간은 개체이면서도 입자로 다가온다. 입자들은 우연적으로 떠돌지만, 순간의 힘에 의해 고정될 수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시간은 순간 안에 꽉 조여 있고, 두 개의 허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현실이라고 썼다. 그에게 현재의 순간과 실재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비연속적인 것이라고 보는 사고를 보여주는데, 오려진 형상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해 놓은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을 연속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정신분열적 상황이 낳는 불안감에 해당된다.

도시풍경들을 보여주는 김민영의 작품은 이 전시의 작품 중에서 가장 거시적인 관점을 가진다. 관점은 거시적이지만 작품들은 매우 작다. 마치 큰 풍경을 잘게 잘라 놓은 양, 단편들은 전시장 기둥 언저리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다. 눈 안에 쏙 들어오는 풍경은 마치 우리가 손안의 인터넷을 통해 세계를 전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가질 때와 유사한 안도감을 준다. 광대한 장면은 나름대로 만만한 형식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빽빽한 건물과 차로 밀집된 도로 등이 포착된 그녀의 풍경에는 현대를 이루는 일련의 단위구조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 전시의 다른 작품들이 유전자나 세포, 입자 단위를 다루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에는 인간이 부재하다. 다만 인간의 흔적들만 있을 뿐이다. 코드로 이루어진 현대적 환경은 이미 인간 개인을 초월한다. 무엇을 위한 노동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피곤한 퇴근 길 풍경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 다시금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