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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개인전 <하나를 위한 이중주> 리뷰

같지만 다른: 두 닮은꼴을 향한 진술

노아영

‘하나를 위한 이중주’에서 작가는 같지만 다른, 두 장소에 대해 질문한다. 이것은 우리를 새롭고 진기한 세계로 인도하기보다, 그냥 스쳐 지나가거나 오랜 시간 묵인해왔던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해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세계에 대한 오랜 질문이자, 가장 명징한 언어들로 채워진 어떤 대답이라 볼 수 있다.

사진 속에는 수원의 오랜 랜드 마크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화성과, 광교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옛 원천 유원지와 신대호수 일원이 새롭게 태어난 광교호수 공원이 등장한다. 수원을 대표하는 같지만 다른 두 장소는, 유사한 형상 안에서 언뜻 보기엔 닮은꼴을 형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말대로 이미지의 연결성이 있어야 비교가 용이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두 대상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이처럼 한 프레임 안에 가지런히 병치된 두 장소는 어떤 설레임과 궁금 점 대신 두 이미지가 대체 어떤 말을 거는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아리송함마저 남긴다. 하지만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의 질문들이 금세 우리 머릿속을 가득 채움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의구심을 위해 사진 속에 몇 가지의 트릭을 숨겨놓고 그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고한다. 수원화성의 장면을 흑백으로 변환하여 이것이 마치 오래 전의 사진인 것처럼 위장하고, 새롭게 탈바꿈 한 광교호수공원의 장면을 상업광고의 한 사진처럼 그럴듯하게 변장하여 관객의 머리 위로 슬그머니 제시한다.

모큐멘터리 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이러한 기법은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할 때 갖게 되는 어떠한 선입견을 그대로 투영시킨 사례이다. 오래된 사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러한 것처럼, 홍보용 사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러한 것처럼 변장해 놓은 기술은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장치로 인해 우리의 지각은 어떠한 미동도 없이 이미지가 주는 거짓 힌트에 쉽게 동요되고 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우리는, 내가 보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질문이 드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를 위한 이중주’에서 수원화성 뒤로 보이는 현대식 상가 건물과 그 뒤로 놓여 진 고층 아파트의 모습을 통해 지각된다. 우리는 뒤늦게 이러한 진실을 포착하게 된 후, 그렇다면 왜 이렇게 표현 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과 질문을 한 아름 떠안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모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역설적인 전달의 효과’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문제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 생각을 유인하기위해, 사진에 역설적인 장치를 숨겨놓은 격이다. 다시 말해 사진의 초점은 두 랜드마크 자체가 아니라, 수원화성이라는 원 도심과 광교호수공원이라는 신도심을 바라보는 우리의 그릇된 시선과, 그로부터 촉발되어진 어떤 선입견과 외면 현상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하나의 대상과 그 대상의 물리적인 재현을 넘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명확한 성질과 진실을 가늠해 보도록 기능한다. 즉 사진은 수원화성과 광교호수공원이라는 두 장소의 모습보다도, 두 장소가 함의하고 있는 어떤 진실에 대해 조용조용 거침없이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사진이 우리 마음속에 솟아있는 원도심과 신도심 사이에 놓인 인식의 장벽과 격리의 논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도시의 재생 이후 숙명적으로 떠안게 된, 우리의 오랜 고민과 갈등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발의 논리와 그로부터 촉발되어진 많은 갈등과 문제들은 현재를 지나 우리의 미래까지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문제는 아마도 우리의 인식에 있을 것이다. 구도시와 신도시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관성, 은연중에 외면하고 담을 쌓으려는 노력 등은 물리적인 갈등을 넘어 인식의 문제로 까지 전이되어 왔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말하기 위해 구도심을 상징하는 ‘수원화성’과 신도심을 상징하는 ‘광교호수 공원’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나란히 병치시켜 놓았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그녀의 책「사진에 관하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진을 통해서 어떤 사건을 알게 되면 사진을 보지 않고 알게 될 때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그런 이미지도 계속 보다보면 점점 더 현실감이 떨어지게 된다. (중간 생략)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쏟아져 나온, ‘의식화된’ 사진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왔던 것 못지않게 우리의 양심을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우리의 현실을 담보로 했던 상당수의 많은 사진은 과장과 확대라는 방식을 통해 때로는 대상이 지닌 진실보다도 더 부풀려 해석 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의 반복적인 노출은 오히려 우리의 양심을 더욱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박정민 작가의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위에서 수잔손택이 말한 의식화된 사진의 논리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사례이다.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 대신, 보는 이 스스로가 대상의 차이점과 공통점 찾고 그 본질을 이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지만 다른, 두 닮은꼴을 향한 소박한 진술은 그 어떠한 과장법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소소한 포착에서 대담한 진실로, 작은 차이가 새로운 변화로까지 진입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마저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