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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의미, 나를 구축하려는 욕망

이빛나

김나래 개인전, <당신의 의미>

2015. 10. 9- 2015. 10.22 / 대안공간 눈

작가 김나래는 타인을 이야기한다. 그 타인의 범위는 외국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다양하지만, 그들의 개인 서사로 들어가 보면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부터 창문이 없는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노동자까지 궁핍과 결핍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계층으로 좁혀진다. 그러한 김나래의 작품에서 타인의 사연을 공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향한 연민과 동정으로 귀결되지만은 않는다. 작품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상호작용으로, 관객의 움직임과 QR코드를 통한 접속으로 존재(타인)를 경험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가령, 작품 <cotton candy>(2015)에서는 봉수아라는 일곱 살 아이가 침대 모퉁이에 누워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린다. 온종일 기다리던 솜사탕 같은 엄마의 냄새와 감촉은 늦은 밤이 돼서야 잠든 봉수아에게 스며든다. 작가는 그러한 봉수아 곁에 그녀를 포근히 감싸주는 엄마의 품을 마련한다. 엄마의 부재를 견디는 봉수아의 시간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마법 같은 이 장면은 관객의 이동과 시선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작품에는 두 가지 이미지, 즉 혼자 있는 봉수아와 엄마와 함께 있는 봉수아의 이미지가 블라인드처럼 생긴 접이식 화면에 교차로 배치돼 있어서 오른쪽에서 바라볼 때는 홀로 잠든 봉수아가 보이고, 왼쪽에서 바라볼 때는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봉수아가 보인다. 한 화면에 공존하는 타인의 현실과 환상이 작가-작품-관객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다른 작품에도 적용된다. 사고로 반려견을 잃은 여자와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죽은 반려견을 닮은 강아지<rainbow>(2015), 홀로 쓸쓸히 연주하는 남자와 여럿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악단<harmony>(2015), 외도(자유연애)가 일상인 애인을 바라보며 그녀와의 오롯한 사랑을 꿈꾸는 남자<rose>(2015) 등 작품을 구성하는 양극의 이미지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따로 또 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타인의 내밀한 공간에 들어가게 된 관객은 낯설고도 친숙한 남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성취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작품이 작동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작품에 대해 (혹은 작가-주체에게) 의구심이 든다. 문제는 작품에 등장하는 타인들 가운데 누구도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인물과 이야기의 허구성을 문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사건화하는 방식에 관해 재고를 요청하려는 것이다.

작품 전면에 위치하는 타인의 삶은 작가가 과거에 매체를 통해 접했던 이야기 혹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연들을 수집해 재구성한 것이다. 작가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요소들-타인의 사연 앞에는 강원도 양양군 마르코Marco 32, 제주도 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슈슈노바Shushuniva 27세 같은 개인의 신원정보가 표기돼 있다-까지 동원해 각기 다른 타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의 것처럼 느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품에 나타나는 타인의 불행과 행복은 작가-주체의 프레임 안에서 명료하게 규정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타인의 비루한 현실 맞은편에는 매번 그 상황을 가뿐히 뛰어넘는 희망찬 미래가 아무렇지 않게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타인의 삶은 동일한 방식으로 유지되고 반복된다. 더구나 타인의 현실에 환상을 주입하고 있는 작가의 행위에는 불행한 타인을 행복한 존재로 구원해 주는 주체의 전지적 지위와 능력이 전제돼 있다. 결과적으로 작품 속 타인은 작가의 관점과 정서 안에서 단일한 존재를 실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신작들은 전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시도는 지금껏 작가의 삶을 지탱시킨 나는 혼자 존재한다.”라는 자의적인 명제를 철회하고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작품에 타인을 불러들인 사건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그간 부정해오던 주변의 타인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그들과 대화하며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공감을 관객과 나누고자 했다. 그것은 작가로서 쉽지 않은 결단이며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야심 찬 기획은 타인의 표피에 머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타인이라는 주체 바깥의 존재를 너무도 쉽게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작가가 구현한 현실과 환상의 극적인 결합에는 타인의 결을 헤아리기 위한 고민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형상이 도드라진다. 거기에는 언어로는 읽어낼 수 없는, 그래서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타인의 삶이 어떠한 이물감도 없이 말끔하게 제시돼 있다. 작가의 말처럼 작품에서 타인은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수단이자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의 존재를 드러내 줄 뿐인 타인과의 소통(관계)이란 타인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를 서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타인을 위한 공간에서 타인의 실존이 소멸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이는 나를 구축하기 위해 재단될 수 있는 존재(타인)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방증해 준다. 요컨대 타인에 대한 상상적 행위는 완고한 를 허물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