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신진작가지원 특별기획전 <KNOCK>展

 

                                                                                                                              
                                                                                                                             이선영 미술평론가

 


자유로운 만큼 자유롭지 않은 예술

2018년에 미술계에 노크하는 신진작가들
 대안공간 눈의 ‘Knock’ 전은 2018년 미술대학 졸업예정자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앞으로의 가능성 있는’ 예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신진작가 지원전시이다. 큐레이터가 직접 전국 미대 졸업전시의 작품을 일일이 체크했으며, 올해에는 대안공간 눈이 속한 경기도뿐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했다. 각 대학마다 엄청난 두께의 졸업작품집을 인쇄하여 배포하는 형국이니 현장에서의 이러한 대답은 반가울 것이다. 작가 선정기준에서 지속성, 가능성이라는 두 단어가 눈에 박힌다. 미대를 다녔다면 가능성은 누구나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속성은 쉽지 않다. 기성세대라고 할만한 40대 이상의 작가들에게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작업하는 삶의 지속은 거의 기적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개 중에는 ‘미리 알았다면 못했을 것’이라고 토로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작가 상당 부분은 자신에게 작가 말고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도 인정한다.

 예술은 자유롭지만 그것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은 까다롭다. 자유로운 만큼 자유롭지 않은 예술, 그것은 역설로 이루어지는 삶의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의 자유롭지 않은 부분은, 예술 또한 사회적 삶처럼 인정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투쟁 중에는 꼭 필요한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기성의 판을 유지 재생산하기 위한, 가령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에 불과한 것도 많다. 형식만 그럴듯하게 갖춰놓고 저마다의 사사로운 이익만 쫓다가 기형적으로 변해있는 괴물 같은 미술 제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들 제자리에 도사리고 앉아 자기만 지시하고 있는 상황, 누가 학교 문을 나서 막막한 시공간에 던져진 이들을 주목할까. 대안공간 눈은 민간 영역에서 이러한 풀뿌리 예술실천을 지속해온 공간으로 인정받는다. 현대미술 작가에게 작업의 중요한 한 축은 시스템과의 관계이다. 과도한 시스템화는 그 시스템을 누수 시키는 활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제도의 영향력이 큰 현대에, 미술의 동력 또한 시스템과의 길항 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상호작용하며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타자들이 나를 작가라고 불러줘야 하며, 그 계기는 작품과 관객이 실제로 만나는 전시회이다. 전시회란 초대하는 측도 초대받는 측도 엄청난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 전시에 참여작가 중에는 졸업 전 외에 전시 경험이 있는 이들도 꽤 있으나, 이번이 처음인 이들도 있다. 그들은 최소한 졸업전시가 마지막 전시가 되는 불행한 사태를 피한 행운아들이다. 연도만 달라지고 지속되는 전시 제목 ‘노크’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상징적 행위를 말한다. 문안에는 또 다른 문들이 있을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9명의 작가들은 처음의 문을 열었다. 서양화과, 동양화과, 조소과 등이 두루 포진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편의상 인간, 풍경, 그리고 개념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것; 신동원, 김수민, 임정은
 신동원의 작품에는 스마일 형태의 이모티콘을 가면처럼 뒤집어쓴 캐릭터가 등장한다. 가면은 자유롭게 썼다 벗었다 할 수 가상의 정체성을 상징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제 2의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다. 가면을 벗는다면 배후의 진실한 본질이라는 것이 있을까. 야수적인 캐릭터 또한 스마일 가면의 변주를 보여줄 뿐이다. 얼굴을 다 가리지 못하는 작은 가면을 쓴 작품 [Smile pig]에서 배후의 실체는 끝없는 욕망의 상징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엇보다도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가면은 보는 것과의 게임 속에서 생겨난다. 보고/보이는 관계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이모티콘화 된 초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검은 양복 일색의 의상 또한 가면 못지않은 억압적 코드이다. 남성은 검은 수트를 입는 계층에 속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춘 채 늘상 스마트한 표정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회가 제시하는 공적 영역의 자기 동일성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전형적 표상 속의 인물들은 고통받는다. 가면은 가면 뒤의 현실을 완전히 가리지 않고 투사한다. 거꾸로 씌워지거나 줄줄 녹아내리는 가면은 인간을 숨 막히게 한다. 작가가 붙인 ‘행복에 관하여’라는 부제는 역설적이다.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통해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고 할까.  

 김수민의 작품은 마치 그림일기처럼 솔직하다. 그녀의 작품에는 자신의 일상, 사랑, 성격, 상황 등이 잘 드러나 있다. 물론 단순히 자기 노출에 머물지 않는 다양한 상징적 장치가 포진해 있다. 이때 개인적인 것은 보편적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여성적이다. 김수민의 작품에서 자기 서사를 이끄는 캐릭터들은 상처 입은 동물같은 모습부터, 모든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전능한 기계 인간까지 다양하다. 특히 여러 상황을 시각적으로 연결해주는 레드의 역할이 크다. 레드는 강렬한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작품 [Disposable]에서 작가는 일회용 사랑에 대해 쓰라리게 표현하며, 작품 [구경]에서 정보 포만의 사회에서 지극히 수동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풍자한다. ‘방황’이라는 전시 부제를 정한 만큼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들은 깊은 심연이 있는 작품 [벗어날 수 없는], 붙잡을 게 없는 손들을 그린 작품 [어디로], 그리고 빈 의자들이 있는 [제자리] 시리즈이다. 작품 [迷兒]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로봇이다. 자신을 그만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기본이다. 오히려 결핍과 모순이 없다면 작업의 동력을 잃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예술은 장식이나 잉여가 아니라 필연이기 때문이다.

 임정은은 인형으로 작업한다. 인형은 미술 분야가 아니고서도 매니아 층이 두터운 취미문화의 한 축을 형성한다. 임정은은 미술대학에 오기 전부터 인형을 수집했다. 예술 이전에 문화가 있었고, 문화는 예술의 토대가 된다. 문화가 질적으로 고양된 것이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이 양적으로 보편화 되면 문화가 된다. 가령 작품 속 인물은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 푸른 눈과 오똑한 코, 진한 화장에 마른 몸, 즉 현대의 전형적인 미의 코드를 모아놓는데, 많은 여성들이 이런 모습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며, 이와 관련된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문화는 소비에 예술은 생산에 방점이 찍힌다. 생산과 소비가 원활하게 이어져야 하듯, 어느 축을 더 우위에 놓을 수 없는 이러한 상호적 관계는 바람직하다. 미술을 하면서 그녀는 수집을 넘어서 자기만의 인형을 만들었다. 그것은 다양한 상황 연출을 통해 이야기한다. 집안에 제사가 많았다는 작가에게 그 이야기 중의 하나는 죽음이다. 삶의 타자인 죽음은 삶에 깊이를 준다. 이 전시에서 무심하게 예쁜 인형은 향불이 피워진 투명 아크릴 박스 좌대 위에 앉아있다. [경계]라는 작품 제목은 삶과 죽음이 원환처럼 돌고 도는 세계의 모호한 경계를 말한다. 유사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인형 또한 인간의 경계를 묻는다.

 

2. 나만의 유토피아 ; 조은이, 권은지, 최혜림
 조은이의 작품 [숲은 길을 잃어버렸다]는 자아가 투사된 풍경이다. 아이들의 최초의 사회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놀이터는 텅 비어 있을 뿐 아니라, 색깔도 빠져 있다. 놀이터 주변을 나무들이 숲처럼 에워싸고 있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사회적 관계에 어려움을 겪던 작가의 심경이 드러난 상징적 풍경이다. 놀이터라는 사회적 공간은 온갖 색깔로 활기가 있어야 하지만 색이 아직 없다. 그것은 앞으로 칠해져야 할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 빈터나 다름없는 놀이터를 감싸는 나무는 보호막이 되어주지만 동시에 타자의 접근을 더욱 차단한다. 그것은 내밀한 사적 영역이 보호와 답답함을 동시에 가짐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가족제도에서 경험한다. 작품 제목에 있는 ‘길’이란 내가 타자에게로 가는 길, 타자가 나에게로 오는 길이다. 한편 놀이터는 완전한 사회적 영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완충지대로, 심리학에서는 마치 엄마의 품과 같은 중요한 자리로 평가받는다. 예술 또한 이러한 완충지대에 존재한다. 그래서 놀이와 예술을 그토록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엄마의 품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모든 것이 만족 되었던 이 잠재적 영역은 다시 구축되는데, 예술은 이러한 구축이 일어나는 중요한 자리이다.

 권은지의 작품 [천록지(天綠地)]는 화려한 색채의 단면이 있는 환상적인 산수화이다. 산수화라는 형식 자체가 유토피아적인 면이 있지만, 그런 측면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회색빛 도시에 싫증을 느끼던 작가가 만들어낸 이상향인 셈이다. 푸른색 계열은 먼 곳에 있는 이상향의 특징을 표현한다. 현실과 환상은 돌고 도는 관계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고 죽은 새인 비둘기를 보면 대개 회색 조다. 그것들의 환경이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도시의 화려함은 이 근본적인 칙칙함을 가리지 못한다. 권은지의 소망이 투사된 이상향은 매우 환하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것이 현실원리로부터 도피, 또는 탈주하는 쾌락원리의 장임을 보여준다. 물론 쾌락과의 게임은 죽음이 깔려있는 위험한 도박이다. [천록지]는 현실에 모델이 있기도 하다. 작가는 중국 광둥성의 단샤산의 예를 든다. 단샤산은 색색의 무늬가 있는 담요로 뒤덮인듯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자연은 예술과 더불어 무한한 다양성의 원천이 된다. [천록지]의 미세한 주름은 설레임의 순간을 파동처럼 기록하는 듯하다. 주름진 형상의 반복적 배치는 정적인 풍경을 동적으로 만든다. 산의 형상은 주름 안에 또 다른 주름이 있는 겹주름이다. 그것은 다양한 양태로 펼쳐지거나 접혀지면서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최혜림의 작품에서 유토피아는 도시에 있는 듯하다. 자연은 설치와 사진으로 이루어진 각 작품마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하늘로 대변된다. 빌딩 모양의 하얀 스크린에 바다 풍경이 투사되는 작품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한다. 어둑한 곳에서 제대로 보이는 영상작품 속 시간대는 빛이 가득한 낮이다. 이러한 초현실적 상황은 자신이 몸 담그고 살아가는 도시의 자잘한 현실에서 초월하게 한다. 그것은 수평선처럼  넓고 깊은 조망을 형성한다. 입체에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은 미디어 파사드 같은 공공영역의 미술을 통해 보편화 되었다. 최혜림의 경우 하나의 건물이 아닌 여러 개의 건물을 스크린으로 삼는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그것은 축소모델이라는 방식을 통해 가능했다. 여러 스크린을 아우르기 위해 작가는 바다 풍경같은 장대한 장면을 활용했다. 바다는 때로 하늘과 구별하기 힘들다. 그 경계는 가변적이다. 작품 [scene#01]에서 하늘 부분이 빛나는 바다 표면이다. 핸디코트로 만든 빌딩형식의 구조물은 철과 유리로 된 모더니즘 건축처럼 구름 뜬 하늘을 반사한다. 벽에 걸린 사진작품들도 푸른 하늘의 비중이 크다. 풍경 사진 속 더불어 찍힌 건물들은 사람의 흔적을 나타내지만,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풍경은 그 전체가 작가의 내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사물, 회화, 작가에 대한 개념 ; 문지수, 이강빈, 이영욱
 사람보다는 사물에 더 많이 에워싸여 싸여 사는 대량생산과 소비의 시대, 문지수의 작품은 사람을 대신하여 소통한다. 이익을 위해 발전하기 마련인 사물들은 매우 경쟁력 있는 촉수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이는 점차 수동화되고 있는 실제의 몸과 함께 가는 상황이다. 인간이 수동적일수록 사물은 능동적이다. 물론 그 사물 역시 인간의 생각과 노동력이 깃들어 있지만, 그것들은 자율화되어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반대로 인간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기보다는 있는 것들 중에서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선택에는 개념이 개입된다. 물론 선택 이후에는 추가 노동이 투입된다. 초현실주의 이후, 현대미술에서 조각보다 오브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추세는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 역전을 반영한다. 너무 낯익은 대상은 의미에 대한 어떠한 자극도 줄 수 없기에 작가는 예외적인 모습을 부여한다. 낯설게 함으로서 주목도를 높이는 것은 오래된 예술적 소통 방식이다. 낯설게 하기의 전제조건은 낯익음이다. 작가는 낯익은 사물들을 변형시킨 평면과 입체작품들에 ‘Extraordinary’라는 부제를 붙였다. 작품 속 샹들리에, 장식 인형, 샴푸 병의 꼭지, 의자 등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합되고 변형되어 삶과 죽음, 영감과 기억, 대상과 관계 등을 말한다.

 이강빈은 첩첩이 쌓아 올리는 식으로 형태와 색채를 만들어내는 유화의 기법을 가림과 드러냄, 그리고 그것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 전달에 활용한다. 그것은 그가 주로 활용하는 매체를 어떤 내용을 담는 투명한 수단으로 삼기보다는, 매체 자체의 속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임파스토 기법들로 이루어진 ‘level up’이라 붙여진 작품들은 개념적 회화인 셈이다. 인물의 실루엣이 있으면서 그려지는 중인지, 지워지는 중인지 알 수 없는 과정 상의 형태를 가지는 작품 [1875-1965], [1926-1980]은 제목부터 역사와 관련된 인물임을 암시한다. 작품 [Imaging]은 군모를 쓴 남자의 여러 버전을 보여주는데, 마치 초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겹으로 물감을 올렸던 형상들의 단면을 나열한 것 같다. [Leveling] 시리즈는 층을 쌓아가는 유화의 기법을 공간화한다. 유적을 발굴할 때 수평면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연대 측정 기준을 삼는 것처럼, 작가는 흑백 사진 속 형상의 층을 드러낸다. 작품 [Leveling 3]은 어떤 풍경을 제일 바닥에 깔린 면부터 분석적으로 보여준다. 풍경, 그리고 젊은 여자와 남자들의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졌을 때, 사진적 기호이든 회화적 기호이든 기호란 이미 부재 하는 것과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나타낸다.

 수수께끼에 가까운 이영욱의 작품은 추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작은 원들이 기계적으로 도열 한 가운데, 중경쯤에 안경 쓴 오리들이 떠 있는 작품, 펭귄, 인형, 기도하는 손 등이 등장하는 작품, 물소 머리 박제, 거꾸로 그린 어린아이, 무슨 기계의 부품 등이 그려진 작품 등이 그것이다. 언뜻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 또한 등장한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빈 곳들은 색다른 연결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공간예술은 회화에 내재된 시간성은 직선적이지 않다. 서사와 관련되어 있을 그림 속 시간은 이리저리 꼬여있다. 아무리 재현주의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림은 산문처럼 읽혀지기 힘들다. 그림은 시에 가깝다. 물론 그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 있다.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 하는데 있어 시는 필수적이다. 시는 난해할 수 있지만, ‘몇 줄 요약’이 필요한 정보화 시대에 시적 상상력은 더욱 필요하다. 이영욱은 이야기를 이루는 구성요소를 선적으로 나열하기 힘든 회화의 내재적 속성을 인정한다. 즉 일목요연하고 합목적적으로 회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위치를 포기한다. ‘작가는 부재중’이라 붙은 부제는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줄 전능한 주체를 부정한다. 그것은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라는 현대적 담론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