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은의 <Ready made in 다실바>展

                                                                                                                               새싹이음 프로젝트
                                                                                                                                     -박주연 평론가

 

조정은의 세계에서 중심이 되는 그림의 주제는 생성과 소멸 그리고 삶과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을 스케치를 통해 극복하는 과정이다.

작가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공간은 늘 폐허로 남았다. 조정은은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을 복원의 방법으로 이겨냈다. 부숴지고 깨지기 직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낸 다음 이를 다시 스케치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재탄생 했다.

한 예로 2015년 대안공간 눈에서 첫 작가전을 시작한 이래 행궁동의 면면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Big gold fish>를 그린 라켈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듯 그의 벽화를 그림으로 그려냈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그녀만의 방법으로 이별의 아픔을 극복한 것.

조정은은 죽음은 다시 흙이 되어 작은 세포로 돌아가는 인간의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순리와 같다고 한다. 우리가 작은 세포에서부터 생겨난 것처럼 인간은 다시 작은 부분이 된다. 조정은의 픽셀을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꿨다.

작가는 픽셀을 그려 넣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생성임을 드러낸다.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인식은 만남과 이별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가치관적 성장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조정은에게 있어서는 다실바 의상실의 사라짐이 매개체가 됐다.

행궁동에 소재한 다실바 의상실의 사장은 옷과 사라져가는 사물들로 작품을 만든다. 조정은은 직접 의상실을 찾아가 주인의 작품들을 화폭에 담았는데 대안공간 눈 카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열된 작품들은 빠르게 변화되고 사라지는 세태에 반기를 들 듯 이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새로운 생각을 던져준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의상실의 사라짐은 완전한 사라짐이 아님을 드러낸다. 사라짐은 곧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조정은 작가 역시 이번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이별 소멸 죽음 등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레디메이드 인 다실바>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다다이즘으로 대표되는 마르셀 뒤샹의 혁신성이 조정은 작가에게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서양의 사조를 차용하면서도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소재들을 엄선해 선택했다.

가령 토큰이나 비닐봉지 돼지저금통 등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소재다. 윤회사상으로 대표되는 삶과 죽음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 점도 흥미롭다.

조정은은 "피카소나 폴 세잔의 예술적 이상들 그리고 불교사상에 심취했지만 나만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다. 입체파에 영향을 받았다. 픽셀작업은 이러한 생각들에 영향을 받은 후 온전히 나만의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작업이다"고 했다.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조정은의 작품세계는 이제 정물화로 대표되는 바니타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적 접근을 시도하게 한다. '인생무상', '삶의 허무'를 주제로 하는 바니타스의 정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새롭고 재미있는 인생의 밝은 부분을 부각하려고 했다. 조정은은 삶의 허무나 교화의 의미보다는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아는 소박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허무함이 가져다주는 삶의 이면에는 신대륙의 발견과 인간이성에 대한 부푼 기대로 가득 찬 모습들도 존재했다. 우리도 조정은의 작품에서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발견하게 될까?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우리는 따뜻한 감성 그 이면의 무언가를 발견해야 될 때다. 아무리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들 말이다.

매년 점진하는 조정은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녀가 이별하는 것들에 대해 눈여겨 보자. 개발로 인해 사라진 그녀의 집, 행궁동의 철거현장, 사라진 다실바 의상실과 같이 이제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감상함으로서 마치 하나의 의식을 거행하듯 우리의 이별방식에 대해서도 돌아봐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