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숙제>
-유지혜《MIND PORTRAIS》展

                                                                                                                               새싹이음 프로젝트
                                                                                                                                     -마틴 배런 평론가

 

이 글은 유지혜 작가를 위한 글이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지난 520일부터 61일까지 대안공간 눈에서 전시된 <Emotional Lump>에 임한 윤지현 작가의 작업노트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예리하고 밀도 있게 그려진 원뿔은 어느 날 내 몸 속에서 튀어나온 인격화된 도형이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특유의 뾰족한 형을 지닌 탓에 타인에게 상처를 내곤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나는 방관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나에게로부터 비롯된 형()이기에.”

당시 필자는 새싹평론가로서 함께 한 첫 아티스트 토크에서 윤지현 작가가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무척 인상 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인상 깊게라고 해둔 이유는, 함부로 공감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편견인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그래서 공감이 간다.”라는 표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잘 믿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나쁘지 않다.”라는 말처럼 그 쓰임새가 분명히 필요한 영역이 있음에도 정체가 좀 모호한 표현이다. ‘간다.’라는 동사, 그것도 가고 있다보다는 덜 동적이지만, 원형인 가다보다는 분명 진행형을 취하고 있는 이 아주 기본적인 동사는 이해수긍과 같이 공감보다는 약한 단계이거나 수동성이 혼재된 단어에나 어울리는 의타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한 심리학 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바라보는 즐거움 이외에는 얻는 것이 없어도 타인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연민이나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다. 타인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아주 생생하게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중략)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는 없다.”

사실 이 내용은 굳이 어떤 책인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상식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 글은 분명 이심전심이란 말이 어렵다는 걸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새삼스럽다. 다음 단락을 더 읽어보자.

단지 우리 자신이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무엇을 느낄지 추측 해 볼 수는 있다 . 내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고 해도 나 자신이 안락한 상황에 있는 한, 나의 감각은 그 형제가 겪고 있는 고통을 결코 전달해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 자신을 넘어선 적이 없고, 또 넘어설 수도 없다.”

단지로 시작하여 없다.’로 끝나는 이 단락에서 우리는 비로소 단순히 역지사지를 초등학교 때 외워둔 사자성어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타인과 감각을 공유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 더 읽어보자.

오직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감각에 대해 어떤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중략)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의 처지에 놓아보고, 타인과 똑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인식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몸으로 들어가며 어느 정도는 타인과 같은 사람이 된다. (중략)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관념이 생생하거나 희미한 정도에 비례하여 타인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고통 받는 자와 처지를 바꾸어봄으로써 타인이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거나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중략) 동정이나 연민은 타인의 슬픔에 대해 우리가 동료로서 가지는 감정을 나타내는 반면, 공감은 타인이 느끼는 모든 감정에 대해 우리가 동료로서 가지는 감정을 지칭하는 용어다.”

상상력. 그 중에서도 공상이 아닌, ‘현실적 상상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공상과 현실적 상상력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게 바로 예술이다. 예술가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상의 형태를 띠고 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현실적 상상력이 필요한 경우가 결국은 많다는 이야기다. 예술 계열의 사람들은 그냥 감성적 존재이고, 인문·사회·자연·실업 등 다른 계열의 사람들은 이성적 존재라는 식의 도식은 중고등학교 시절 딱딱한 학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인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생각을 예술계나 인문계 출신들조차 많이 한다. 그들에게 그림을 그리거나 무용을 하는 건축 전공자는 그냥 특이한 사람들인 것 같다. ‘포스트모던적 가치라고 그저 외워놓은 단어 탈경계의 진정한 이해와 실천은 참으로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아는 한 작가는 무척 말이 많은 사람이고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림과 평론으로는 소통을 이야기하면서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 작가처럼 세밀하게 이야기하려 노력하고 중간 중간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인정도 하는 그런 사람을 필자는 차라리 더 공감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171013일부터 26일까지 예술공간 봄 1전시실에서 <MIND PORTRAITS>展에 임한 유지혜 작가 역시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작가의 고뇌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작가노트를 맨 앞부터 살펴보자.

나는 항상 타인을 만났을 때 외적인 모습을 만나 판단하기도 하지만 주로 그들의 성격에 매우 관심이 많다. 그 어느 한명도 유사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은 누구들 만나고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 변수에 따라 매번 다르게 발현되는 것을 발견하며, 때론 실망도 하고 존경도 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나는 정작 나의 내면에 대한 파악이 전혀 되어있지 않고 관심이 오로지 타인을 향하여 있다는 걸 발견하였다. 이 작품들의 시리즈는 남을 향한 나의 관심을 나에게 돌려 자신을 탐구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유지혜 작가는 문두에 제시한 윤지현 작가처럼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외에는 다른 점이 더 많다. 윤지현 작가는 추상적이라면, 유지혜 작가는 구체적이다. 윤지현 작가가 동양화의 기법과 느낌을 잘 드러내고 있다면, 유지혜 작가는 명백한 서양화이며 세필 화법의 테크닉도 매우 좋다. 윤지현 작가는 다소 소극적이고, 유지혜 작가는 다소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가 더 현실적이고 누가 더 공상적인가를 묻는다면 답하기는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 둘 다 자신의 내면에 천착해본 것이기에 그 형태의 기하학성과 공상성의 정도를 보이는 그대로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대화를 전제로 좀 더 면밀한 도상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지혜 작가가 그린 내면의 형상들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여기에는 그 쉬운 몬스터라는 말조차 섞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유 작가의 전시에 대한 감상은 아티스트 토크가 아닌, 필자가 다른 일로 공간에 들렀을 때 일단 기분 좋게 감탄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러댄 기억이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평론은 아직도 도입 단계인 반쪽짜리 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지혜 작가에 대한 평론을 쓰는 데 있어 일단은 그의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작가노트를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그만큼 그의 생각을 글로 옮겨놓은 것은 적어도 이해의 단계로 진입하는 데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를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도 모색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을 탐구하는 그를 더욱 발견하고, 끄집어내며, 논술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예술도 결국은 사회적인 것이라 하겠다. 문득 볼빨간 사춘기의 유행가 남이 될 수 있을까즐겨들으며 이별 준비를 하고 있는 누군가들에게 짓궂게 묻고 싶기도 하다. 당신 정말 그럼 남이 아닌, 그 사람과 거의라도 같은 사람이 되 보긴 했냐고. 미술은 결국 논술이다. 그리고 논술은 다시 예술이 된다. 고로 미술은 예술이다. 그래서 이제 미술이란 말을 점점 지워내도 된다는 거다. 우리 마음의 자화상을 드러내고 이해하고, 공감에까지 이르기 위해 우리는 더더욱 애써야 한다. 더더욱 읽어야 하고, 더더욱 들여다봐야 하며, 더더욱 들어야 한다. 우리 안엔 우리도 잘 모르는 그 무언가가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