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소유란 무엇인가.>
- 이찬주 작가의 <공사중> 평론 -

                                                                                                                               새싹이음 프로젝트
                                                                                                                                     -마틴 배런 평론가

 

0.

고등학생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요즘 고등학생들은 연애도 하고 심지어 어장관리까지 한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듣게 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 때는이라는 말로 말을 시작하면 꼰대아재라는 것쯤은 알기에 그야말로 목구멍에서 새어나오는 그 말을 의식적으로 입을 닫아 막아내곤 하는데, 몇 년 전 유행한 가요 제목이기도 한 <>은 요즘 10대 후반, 20대 전반의 연애 문화를 잘 대변해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라는 이 노래의 가사는 너무 많이 패러디가 되어서 이젠 별 감흥이 없고 심지어 단물 다 빨아 먹히고 뱉어진 껌처럼 값어치마저 없어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노래가 유행한 1년 간 그게 싫어서 단 한 번도 그 노랠 흥얼대지 않았던 필자에겐 요즘 따라 이 노래도 결국은 영화 <레옹>과 같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중성을 잘 표현한 노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뿔싸. 의도한 게 아닌데, 이렇게 되면 진짜 아재되는데... <> 하면 소유라는 예명의 여자 가수를 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필자는 이 글의 제목에 소유가 들어갈 수밖에 없음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져 포털사이트 창을 열어 소유를 검색해본다. 그 어떤 소유보다도 먼저 그녀의 프로필이 뜬다. (, 그녀의 본명은 강지현이었구나.)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녀가 속했던여성 4인조 댄스그룹 씨스타는 5월 해체했기에 최신기사의 제목들을 보면 죄다 씨스타 출신 소유, 13일 첫 솔로 앨범등 홀로서기에 관한 타이틀로 도열해 있었지만, 여전히 프로필에는 소속 그룹이 씨스타로 되어 있다. (이쯤이면 독자들은 아니 이게 무슨 얘기야 왜 이찬주 작가 평론을 시작도 않고 가수 소유 얘기만 줄창 하고 있는 거야! 라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땐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야 한다.) 아마도 그녀가 스타쉽 엔터테인먼트를 떠난 것이 아니기에, ‘소유라는 예명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을 수 있듯 (사실 그룹 소속 가수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 그룹이 해체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소속사로부터 떠나게 되면서 자신의 예명과 그룹명 자체에 대한 소유권을 잃는 것이라고 주변 님들에게 익히 들어왔다.) 소속사 역시 자신들의 캐시카우 브랜드인 씨스타스테디셀러로 보유함으로써 언제라도 그 안에서 다시 퍼플카우적 상품을 만들어낼 심산일 것이다.

이제 다시, ‘이쯤이면이 글은 한 미술가에 대한 평론이자 대중문화 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맹세코 필자는 단지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글쟁이일 뿐, 가수 소유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박약하며 따라서 그녀의 근황을 홍보할 어떤 이유와 동기도 없으나, 쓰다 보니 그녀가 부른 <>이라는 곡이니, 예명이니 하는 사적 소유물들이 가진 중의성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다. 참 머리가 좋은 것 같다.

1.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 제가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눈발이 날리던 올해 초, 연남동에 새로 문을 연 신기한 공간 <무인서점> 앞을 지나다 그 안에 설치된 그의 작품을 보고, 들어가 우연히 그를 처음 만나 나눈 첫 번째 대화 때 들은 겸손 망언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이해 못할 말도 아닌 것은, 그간의 또 다른 대화나 인터뷰들을 참고해볼 때 아마도 그가 현실구성론적 입장보다는 현실반영론적 입장에 서 있는 우리 시대 한 젊은이이기 때문이리라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차례 보도된 바와 같이 그는 공사장에서의 경험들을 토대로 작업해왔을 뿐만 아니라 변변한 자기 소유의 집이나 차가 없다. 현재는 석사 과정 조교로 일하지만, 학업과 일을 병행하느라 공부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배운 게 없다.”는 말에 상처 받으며 그런데 그것이 예술로 표현되었을 때에는 각광을 받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어쩌면 특별하지 않은, 지극히 정상적인 청춘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시인이 그랬듯 이찬주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인 것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

지난 911일에 발행된 <CNB저널> 499호에 소개된 이찬주 작가에 대한 기사 말미를 발췌한 것이다.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의 꽤 많은 구절을 연상시킨다는 김연수 기자의 분석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단지 무언가를 많이 세우고,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어떤 정신적 형상을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솔직히 지금은 매우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필자가 최근 한국의 도시재생 사업들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김수근의 제자 승효상 때문이기보다는 이찬주와 같은 작가 때문이다. 그는 작가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이제 그렇게 분명한 작가가 되었다. 지금은 씨스타 소속이라고 하지 않는 씨스타 소속 소유처럼.

2.

그렇다면 이제 그의 대안공간 눈에서의 전시명인 <공사중>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살짝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어떤 대세가 중흥기를 누리고 있을 때엔 그 대상에 대해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는 취향, 아니 여기선 취미쯤으로 해두겠다. ‘취향은 좀 더 존귀한 언어이니까... 그래, 취미가 있다. 그래서 그 대세가 싹을 틔워 줄기를 만들어 올라갈 즈음을 먼저 목도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이 피운 꽃이 한참 지났으나 썩어 없어지지 않고 기억되거나 박제되길 원할 때 재조명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갖고 살아가는 부류다. 그런 의미에서 15년 전 쯤 유행했던 시트콤 <세 친구>의 명대사 나 지금 작업 중이야.”라는 말에 대해서는 작업의 신성성을 길바닥에 패대기친 듯한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는 생각으로 유난스러울 정도로 거부감을 드러냈었고, 10년 전 뉴욕의 첼시 지역을 취재하며 하이라인 파크가 조성될 것이라는 소식을 월간 <퍼블릭 아트>를 통해 전했으며, 요즘엔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공사중이기도 한 이찬주 작가의 아직 하고 뜬 건 아닌 2017년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벌써 5개월쯤 된 것 같은데, 초여름 어느 날 용인에서 강의를 하다가 문득 이찬주 작가에게 오늘 학교 계시면 찾아뵈어도 되냐고 문자를 하고 찾아가 커피를 얻어먹은 적이 있다. 학교 앞 작은 카페의 노상 테이블 의자에서 한쪽 다리씩을 괴어 올리고 비스듬히 앉은 두 남자는 30대의 잘 빠지지 않는 뱃살에 대한 잡담과 함께 운동할 시간조차 없는 업무 과잉의 요즘 날에 대해 변명 겸, 축하 겸, 고민 겸, 나름의 분석을 늘어놓았다. 학부생들의 졸업전시회 준비를 도와주다 잠시 나온 그는 슬리퍼를 신은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하반기 전시 스케줄 조율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여유로움과 적당한 강박, 자신감과 겸손함, 생동감과 피곤함이 혼합되어 있었다. 공사장의 물질들을 이용해 단순히 미니어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경험의 기억들을 재현하는 그의 작업은 그래서 무척이나 포스트모던적이다.

3.

그래서인지 그는 단순히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비판하거나 적당히 이용만 하는 여느 작가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는 잘 깨지지 않을기록이나 좀 더 소중한재산에 대해서는 소유를 넘어 보유(保有)’라 하는 것에 주목하며 무소유주의의 뜬구름을 먼저 학습하고 마음속으로는 바로 폐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 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언젠가 보게 된 출처 불명의 원고에 언급되어 있는 2차 산업과 3차 산업에 대한 구분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늘 두 번째의 일을 할 수 있는 계급으로 진입해야 하며 그 안에서 소유의 기제들을 축적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찬주 작가는 그러한 유형에 들어간다고 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하여 첫 번째 유형에만 속한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즉 무언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공사중>展은 진정 작업중인 시간 속의 예술적 행위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그에게 작가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무의미한 언어적 규정의 굴레 싸움일 뿐이다. 그는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그냥 이찬주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꽤 많은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굳이 청춘이라는 자위적 언어만큼은 쓰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낮에는 이번 겨울 들어 세 번째 눈이 내렸다. 필자는 그를 처음 만난 올해 초를 다시 기억하며, 올해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를 만났음에도 감사한다. 필자가 주최했던 <옥상예술제>에 선뜻 작품을 들고 찾아와 참여해주신 점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얼마 전에 따로 리뷰를 쓴 구로 강남아파트 스페이스 어반 콘크리트에서의 <공사중 – 남겨진 것들의 시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그도 많은 일이 있었다 한다. 당신들도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응원한다. 나를 스스로 응원한다. 고로 당신들도 응원한다.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지 않아도, 아니, 소유할 수 없어도, 또한 관계를 명확하게 갖지못해도, 어렴풋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쌓아나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우리는 늘 공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