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끌어안는 방법>
2017  PROJECT ZEBRA_캐리리

                                                                                                                                             
                                                                                             -전유정(대안공간 눈 인턴큐레이터)

 

.말로 전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다. 그 명명할 수 없는 감정과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캐리리 작가는 붓을 들었다. 캐리리(Kerri Lee)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희는 자신의 화폭에서 그간 그리던 얼굴을 지워내고 돌연 추상으로 작품 방향을 바꿨다. 작가는 20대의 절반을 외부인이자 타인으로서 미국에서의 활동을 견뎌낸 후 현재 한국으로 귀국하여 추상화가로 활동 중이다. 그러나 폭풍처럼 어지럽던 순간들과 달리 화폭 위에 물감들은 마치 달팽이가 자신의 길을 가다가 멈춘 궤적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그 물감의 무더기 위에 요동치는 필선이 작가의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걸까. 태풍의 눈에 들어선 것처럼 고요한 물감의 침묵은 어쩌면 작가 캐리리가 꽤 오랜 시간 간직해온 ‘열병(Fever)’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캐리리 작가는 여러 개의 캔버스를 바닥에 늘어놓은 후, 불규칙적으로 파란 물감을 칠한다. 그 물감이 캔버스에 닿는 순간은 마치 ‘완벽한 추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라도 하듯 자유롭다. 그러나 ‘완벽한 자유(utopia)’는 더더욱 형상화할 수 없다. 자유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들이 있다. 먼저 작가는 마음에 드는 색과 형태가 나올 때까지 물감을 쌓고 또 쌓으며 바탕을 깐다. 그렇게 깔린 물감들은 특유의 묵직함과 색을 품고 있다. 그 촘촘한 바탕 위에 작가는 물감을 흠뻑 적셔 뿌리거나 칠해, 물감의 질감이 확연히 느껴지도록 표현한다. 그리고 아크릴, 연필, 오일 파스텔 등 혼합매체를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표현된 획들은 때론 먹먹하게, 때론 고요하게, 때론 격동적으로 변주되며 특정한 모습을 의도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어쩐지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다. 조금 짓궂게 표현하자면, 흡사 병적으로 집착하는 작업 과정은 작가의 의도와 그의 기저에 깔린 ‘경계인’으로서의 불안으로부터 탄생한 무의식의 만남이다. 완벽한 자유와 규칙사이에 자리한 캐리리 작가의 내면으로의 침투는 짙은 파랑과 묵직한 물감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 물감들은 여타 다른 추상화처럼 뚜렷하고 강렬한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한 쪽으로 완벽히 치우칠 수 없는 오묘한 색의 향연이 물감을 쌓던 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게다가 작품명들은 하나같이, 그러나 제각기 다른 표정의 문학적 언어의 향연이기에 더욱 그러한 관여의 여지를 내보이고 있다. <Things We hold> 연작에서의 고여 있는 물감의 모양은 우주를 유영하는 물방울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고, <Breath> 연작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순간을 마치 횡으로 자르듯 파고든다. 그런가 하면 <Stop to Breathe> 시리즈는 그 숨이 침전해온, 사실은 ‘비가시적(非可視的)’이었을 묵직한 덩어리를 ‘가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떤 운동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을 견뎌내며 캐리리가 품어낸 ‘열병’은 그렇게 천천히 나아간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떨어지는 외줄타기를 하듯, 조심스레 쌓아간 물감의 흔적들은 그래서인지 매우 위태롭고 때로는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러나 열병이 만들어낸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캔버스 위에서 더욱 고고히 피어난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뜨거운 열병과 타고 남은 감정들로 엮여 있다. 제어할 수 있어야만 했던 자유, 혹은 예정된 자유는 애타던 열병으로 인해 파란 멍이 든 형상으로 태어난다.

이처럼 추상과 자유를 향해 붓을 움직이면서 사각의 캔버스 틀 안에서 고요한 규칙과 침전을 맞이하는 물감들은 작가의 페르소나(persona)가 된다. 이는 그의 화폭에 늘 존재하던,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얼굴의 가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것은 결코 의도적인 거짓이거나 허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표정과 감정들처럼, 숨길 수 없는 감정의 얼굴일 뿐. 하지만 완벽히 모든 것을 지워낸 얼굴도 아니다. 숨기고 싶은 과오는 일기장에도 적지 않는 것처럼, 묵직한 물감 너머로 자리한 불안은 엿볼 수 없는 작가만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 불안을 작가는 피하지 않는다. 작가는 모던 시대가 낳은 완전/불완전의 이분법적 억압을 통찰의 근거로 삼고는 있으나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색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말한 현대인의 ‘지위 불안’과는 다른 결로 이야기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다가가고 만져본다. 그 과정에서 그의 불안은 더욱 커지기도 하고, 카타르시스(catharsis)처럼 해소되어 다음 감정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 시간들은 캔버스라는 물질 안에 가시적인 형태로 구현될 뿐이고, 그렇게 표현되지 못한 저 너머의 순간들을 작가는 붓의 궤적을 따라 쫓아가고 있다. “정지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작가노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캔버스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만약 시간을 물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작가는 붓의 획으로 정의했으리라. 그렇게 캔버스 위에 쌓은 흔적들은 감정과 순간들을 겪는 작가만의 시간이다. <Thing We Hold> 연작에서는 그가 차마 놓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애타게 흘러내리고 있다. 잡을 수 없기에 애타는 열병은 시간이 지나 여러 색을 품는 멍처럼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그 캔퍼스 위에 축적된 시간들이 마냥 아프지 않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작품을 본다. 캔버스 위의 물감의 군상이 이제 더 이상 완전한 침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캐리리가 붓을 따라 쫓아간 열병의 끝에는 그의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작은 소리로나마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통해 논리의 속박에서 벗어나 상상의 공간을 찾아 나서라 일렀던 것처럼, 캐리리 역시 자신을 억누르는 억압과 열병을 벗어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허나 그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발을 들이면서도 놓지 못한 현실의 ‘열병’은 그가 끊임없이 들여다 본 얼굴을 돌연 흘러내린 순간으로, 타는 갈증으로, 묵직한 물감의 획으로 모였다. 그렇게 캐리리 작가를 닮아 차갑고 뜨거운 색을 머금은 화폭은 쉬지 않고 우리에게 외친다. 나아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