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언젠가 행방불명될지언정.>
이규환의 《대기된 행방불명》展

                                                                                                                                                 
                                                                                                   -전유정(대안공간 눈 인턴 큐레이터)

 

, 언젠가 행방불명될지언정.

 

더운 여름, 그보다 뜨거운 땀을 흘려가며 긴 시간 파쇄지를 뭉쳐 블럭을 만든 이규환 작가의 작업은 매 설치마다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 수고스러움에 대해 그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무너져 내리는 탑을 연출하고자 했으며, 또 다른 이유로는 사라진 익명의 사람들의 자기소개서가 접착제 없이 한데 뭉쳐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형상을 의도한 것이라 말한다. 그의 말대로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낮아졌고, 견고한 '' 또는 '기둥' 보다는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에 가까운 형상이 되었다. 비가 오면 눅눅한 비에 찢어지고 바람이 불면 자기만의 방에서 벗어나 저 멀리 사라졌다. 그렇게 그가 일정한 간격으로 갈아낸 파쇄지는 누군가의 야심찬 꿈이 녹아있는 또는 그렇다고 믿고 있었을 전시계획서와 자기소개서였다.

이규환 작가는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러 파기해야 할 포트폴리오들의 주인을 인터넷에 찾아보았다고 한다. 대개 많은 작가들은 포트폴리오를 제출했을 그 시기를 끝으로 작가로서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고, 작가는 그것이 마치 행방불명 될 미래의 자신 같다고 했다.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에 막 발을 들인 나와 같은 이들은 불안정한 미래 덕분에 끊임없이 흔들린다. 백번은 흔들려야 꽃이 된다던데, 과연 그렇게 흔들리고서도 뿌리를 내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한 미래가 두려워 홀연 불안정한 꿈을 접고 우리는 사라진다. 그 이후에도 불안한 시기들은 반복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한 틀과 같은 자기소개서의 1mm남짓 되는 공간에 우리를 욱여놓고도 우리는 종종 행방불명된다. 그렇게 '' 역시 이규환 작가의 <존재하지 않는 자의 탑2>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처럼 모두의 이름을 인위적으로 지워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모두의 이름을 적은 셈이다.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앞서, 행정적인 편리에만 치중한 나라의 복지 시스템을 지극히 일상으로서 비판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명장면이자 제목인 ', 다니엘 블레이크'가 정부의 행정기관 벽에 크게 쓰이는 것은 이규환 작가가 특정 인물들의 이름을 인위적으로 지우는 것과는 정 반대의 행위지만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름을 명받은 '인간'이 아닌, 획일화된 기준에 의해 서류상의 '불특정다수(Anonymous)'가 되는 우리 모두는 서류에 존재하기 이전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속 '다니엘 블레이크', 작가 '이규환'도 이와 같이 행한다.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와 이규환 작가의 공통점은 단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이규환 작가는 별도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얇게 인쇄된 종이들끼리 뭉쳐진 힘으로 블럭을 만들고 그것을 서로 기대어 쌓는 방식을 사용했다. 작가는 이와 같은 작업 방식에 대해 개개인은 큰 힘이 없지만 서로 기대어 큰 탑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언급했다. 어쩌면 집단지성이라고 하는, 부르기 좋은 말에 대한 우려와 비웃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모두 관통하는 우리시대의 오벨리스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게도 이와 같은 상황은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극적으로 큰 부를 가진 이나 정부의 큰 도움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곁에 있는 이는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이들이다. 이규환 작가의 작품 역시 그렇다. 이 긴 탑을 쌓기 위해서는 분명 한 두 명의 포트폴리오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이 사회에서 이름이 지워져 행방불명된 이들이지만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다. 이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며 때로는 절망적이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지워진다고 해서 작은 미동도 없을 사회에 우리는 서로밖에 없음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대한 변화는 한 번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인지'에서부터 시작할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의 탑2>부분, 파쇄지, 아크릴파이프, 전구, 가변설치 2017

다시 그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직 우리는 큰 변화 혹은 거창한 수식어보다 아쉽게 사라진 이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라진 익명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여러 미학적 장치들 ? 이를테면 아파트 ? 에 대한 작업들보다도 더욱 매시브하고 또한 아프다. 아파트는 아파트라도 있지 이 꿈들은 이미 화장터에 가 없어졌고, 아니 산 채로 유체 이탈한 본 주인도 유령이 되어 더 이상 찾으려 하지 않은, 유기된 시신이다. 그들의 영혼을 육체와 이탈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문서작업, 페이퍼웍이다. 그들은 페이퍼웍을 원했고 페이퍼웍을 시작했으나, 페이퍼웍의 몇 천 단어로 실종되고 말았다. 나는 이 속에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을 수식한 단어들을 추측해본다. 그 중 concert-로 시작하는 작은 파쇄지의 한 부분을 발견한다. 이 알파벳들은 단어가 되기 모자라지만, 누군가를 수식하려 했던 수사어임은 분명하다. 그것이 온전히 ''를 수식하기 이전에 주인공은 행방불명되었지만, 분명히 작품을 통해 기억은 할 수 있다. 이 탑은 마치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위로를 위해 존재하는 납골당 또는 위령탑처럼 우뚝 서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이들을 명확히 헤아릴 수 없고 단지 짐작할 뿐이다. 타인을 오로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니 심심한 위로를 떠올려본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화장'을 하듯 누군가의 이름을 지워내는 작가의 퍼포먼스(<그럼에도...> 싱글채널 비디오 524, 2017 )의 결과물이 하얀 재처럼 쌓여 영상으로 다시 탄생하고, (<파쇄 눈> 싱글채널 비디오 1036, 2017 ) 그것이 다시 순환되듯 위를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될 순간들을 기억한다.

, 언젠가 행방불명될지언정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