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를 그림에 담아내기>展

                                                                                                                               새싹이음 프로젝트
                                                                                                                                     -임초영 평론가

 

일기를 꾸준히 쓰는 사람은 자신의 일기가 그 자체로 개인사적 사료로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고 때로 왜곡되며 현재의 시점에서 교정된다. 때문에 현재는 물질화된 과거로부터 참조되고 재인식되어야만 일관적인 맥락으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이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매체이더라도 말이다. 개인 기억을 담은 매체가 언제나 엄정하고 학문적인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주관성은 어디에나 끼어든다. 그러나 과거의 기록이 미래의 맥락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기록에 신뢰를 부여한다. 누구도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미술 작가의 작업은 일기와 닮아있다. 동시대 작가가 모두 자신의 개인사나 기억을 토대로 작업하지는 않는다. 작품이 가질 수 있는 주제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다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작가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무언가로 작업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감각과 경험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갖는 반경에 시간성이 가미되면 그것은 작가의 세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즉 작가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일기인 셈이다.

장유정의 《이젠 괜찮아》전과 조미예의 《Your Bucket List》전은 작가 개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매체로서의 작업을 보여준다. 장유정 작가의 전시는 같은 정물을 그려온 이전의 세 전시 《선인장과 나》, 《Paradise of Loneliness》, 《안아주세요》전에 이은 네 번째의 전시로 지난 작업과는 다른 두드러진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이다. 과거의 전시가 홀로 있는 선인장들을 수없이 그려온 작품들을 보여준 것에 비하면 두 선인장이 머리를 맞대고 꽃을 피운 작업들은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작가에게 개인사적 변화가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작가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선인장이라는 대상은 매우 고독하고 척박한 토양을 버텨내는 이미지를 나타낸다. 지치지 않는 생명력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랜 고통을 감내해야한다는 이면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대상으로 선인장을 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Paradise of Loneliness》전의 제목은 선인장이 드러내는 이중성을 부각시킨다. 고독의 지극한 끝에 이상향이 있다고 말하는 듯한 모순적인 단어는 선인장에게는 일상이다. 오직 홀로선 고독을 견디고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라는 이상을 기다리며 현재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시를 설명하면서 언제 받았는지 모를 선인장이 집 한 구석에서 보살핌도 없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작품의 소재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전시는 이전 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태도를 보여준다. 마치 과거의 주체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이젠 괜찮아,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사적 변화를 현재의 작품에 투영하면서 소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접목이라는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과거를 참조하면서도 현재의 변화를 충실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인장은 자연 상태에서는 홀로 서있는 존재이지만 인위적인 접목을 통해 서로 다른 품종을 이을 수 있다. 작가는 온실에서 접목되어 상품으로 판매되는 알록달록한 관상용 선인장대신, 자연적으로 이어진 것 같은 선인장들을 보여준다. 마치 서로의 자원과 양분을 교환하고 함께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두 선인장은 서로 다른 뿌리와 화분을 지니고 있지만,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의 접점으로 인해 만나고 고독으로부터 벗어난다.

조미예 작가의 작품은 한 눈에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캔버스 천 대신 실크를 사용하여 여려 층위로 겹겹이 쌓인 그림은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색채는 생명의 환희 같지만 가느다란 나뭇가지들과 낙엽은 을씨년스럽다. 작품들을 작은 방, 하얀 벽으로 도배되지 않은 공간에 바니타스를 의미하는 설치작품과 함께 놓았을 때 전시는 모순적인 추억의 장소로 등장한다.

작가는 개인적 상실의 경험으로 인해 죽음에 대해 탐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은 해골모양 꽃이 들어있는 화병과 꽃다발은 죽음을 상징하는 바니타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고전적으로 해골이 등장하는 정물은 현실의 영원성을 경계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화려한 색상의 그림에서 작가가 개인적 상실을 경험했던 세계는 단순한 바니타스로부터 벗어나, 정적인 죽음이 그간 경계해왔던 생명이 순환하는 세계로 변화한다. 부드러운 실크에 혈관을 본 따 그린 나뭇가지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세계는 밝고 눈에 잘 띄는 색상이 어두운 색 위에 겹쳐지면서 어두운 죽음 위에 화려한 생명의 세계가 다시 드러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상실은 덮을 수 없는 짙은 색을 띤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상실은 마치 유화의 바탕색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고전적 바니타스는 적극적인 교훈의 방식으로 상실을 해결하려고 했다. 상실은 운명이며, 감출 수 없는 것이기에 생활에 언제나 함께 함으로서 상실된 존재의 과중함을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런 바니타스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간 형식으로 상실의 여파를 변화시킨다.

작가의 과거 작품이 죽음의 형상과 존재의 슬픔을 모사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이 가지고 있는 양면, 반대의 시선, 즉 생명을 같이 드러냄으로서 상실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과거의 경험이 다는 각주들을 그대로 가져오되, 그 위를 덮을 본문에 생명의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작가의 관심이 죽음보다 삶 쪽으로 옮겨갔음은 전시장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버킷리스트 게시판을 통해 알 수 있다. 관객들이 죽기 전까지 성취하기 원하는 소망을 적게 한 공간은 마모되어 사라지는 분필로 채워지게 되어있다. 죽음 이후에 버킷리스트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목록에 지나지 않겠지만 살아있는 이에게는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가장 가치 있는 목록일 것이다. 버킷리스트는 그 자체로 죽음과 삶이 얽혀있는 매개체인 셈이다.

두 작가의 전시는 작가 본인이 현재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최신의 업데이트 상황을 보여준다. 장유정 작가는 근원적인 고독을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극복하는 모습을 맞닿은 두 그루의 선인장으로 표현했고 조미예 작가는 상실의 경험이 바꿔놓은 삶과 죽음의 무게를 작품을 통해 다시 반전시켜 삶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의 작업은 마치 언어로 쓰인 일기처럼 작가의 개인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작품과 일기가 다른 점은 작품은 신중한 태도로 현재를 탐구하고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정밀한 시각적 언어로 변화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현상을 미적 언어에 담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두 전시가 드러내는 미적 변화가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