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들대로 산다!
- <
내맘大路
STUDIO>展

                                                                                                                               미술평론가
                                                                                                                                         -김종길

때때로, 많은 일들이 우연처럼 펼쳐진다. 9월이 지날 무렵 예술공간 봄을 찾았던 그 때도 그랬다. 나는 그날 전시를 보러간 것이 아니었다. 예술공간 봄이 탄생하고 난 뒤 마치 어떤 부채의식처럼 게으른 방문을 하게 된 것일 뿐이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고 있는 터에 더 늦었다가는 참 면목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맘大路 STUDIO>展을 보게 되었으니 참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지나고 난 뒤에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그런 인연들이 서로 이어져 펼쳐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살이의 모든 것들이 인연법 아닌 게 없다고는 하나 그날의 인연은 내 안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무엇이 그렇게 큰 파장이냐고 누가 물으면 난 대답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늦은 리뷰를 탈고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파장의 진앙이 무엇이었는지 나 또한 의문에 휩싸여 있으니까.

내맘大路 STUDIO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서둔동에 작가 몇이 작업실을 열었다는 소식을.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한달음에 달려갔을 터인데, 일상이 너무 거칠고 빨라서 내 마음도 참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데 예술공간 봄의 탄생을 축하하러 간 자리에 내맘大路 STUDIO’가 와 있었다. 그러니 봄을 축하하는 것은 뒷전이고 전시에 관심이 쏠렸다. 도대체 어떤 작가들이지? 왜 그곳으로 가게 된 거지? 어떤 작업들을 했지? 내 안에서 뭉게구름 같은 의문들이 솟아올랐다. 이것저것이 한꺼번에 솟구쳤으나 그렇다고 혼란스럽지 않았다. 대안공간 눈의 전시장과 봄 전시장을 돌면서 이미 그 상황들의 장면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맘大路 STUDIO’1970년대부터 가발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부터 문을 닫은 채 방치되었다가 2013년경부터 지역 예술가들에 의해 자생적 창작공간으로 탄생하게 된 곳이다. 이부강, 송태화, 김수철, 박지현, 임정은, 박인 작가 등이 이곳에 입주해서 작품 창작을 하고 있다. 작업실은 작품이 잉태되는 곳이다. 앤디 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을 ‘art factory(예술공장)’이라고 해서 아트 CEO’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폐공장을 예술 창작공간으로 탄생시킨 것은 참 멋진 일이다. 폐교나 농협창고 등을 활용한 사례는 많아도 폐공장을 창작공간으로 바꾼 국내 사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내 마음큰 길(大路)’, ‘작업실(STUDIO)’의 개념을 뒤섞어서 만든 작업실 이름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훌륭했다. 예술가들이라면 그 정도의 배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부강

눈 전시장에서 처음 맞닥뜨린 이부강의 작업들은 그리기라는 회화의 형식을 월경(越境)하는 신선한 맛이 있었다. 또한 회화적 평면으로 구축해 놓은 작품들은 독특한 마티에르가 던지는 풍부한 색질감으로 인해 미학적 감성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보는 그의 작품들은 큰 차이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일종의 오브제 콜라주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그려야 할(?) 장소들을 답사하거나 사진으로 기록한 뒤, 오래된 목재 파편들을 이용해 그 이미지를 재현한다. , 여기서 그의 미학적 특질에 대한 두 가지 요소가 탄생한다. 첫째는 그가 재현하고자 하는 공간과 장소로서의 풍경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찾아 들어간 서둔동의 폐공장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으나 그의 회화적 풍경들과 오버랩 되면서 기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둘째는 오랫동안 시간이 쌓여서 자연스레 여러 색을 얻게 된 목재 파편들이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화면 속 풍경들은 도시의 바깥으로 밀리는 가난한 공동체의 서사를 보여주고, 이미지를 이루는 색질감으로서의 오브제들은 시간의 지층을 드러낸다. 놀라운 것은 그 둘의 서사를 엮어서 세밀하게 재현하고 있단 점이다. 입체적 감각으로 완성된 이 작품들의 리얼리티는 그래서 새로운 리얼리즘의 미학을 예고한다.

김수철

봄 전시장의 지하 공간을 채워 놓은 김수철의 작품들은 그 스스로 “‘에 대한 신비로운 직관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가발과 하이힐을 생산했던 폐공장에 대한 미학적 박물지학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민족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장시간에 걸쳐서 직접 현지조사에 의해 만들어 나가는 민족지()와 비슷하며, 백과사전식으로 분류하고 종합했던 박물지(博物誌)와 다르지 않았다. 전시공간은 그러나 박물지의 컬렉션을 근대적 교육전시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생경할 정도의 음화(陰畵)로 펼쳐 놓았다. <검은벌레-채집>의 신발 오브제들은 까맣게 타버린 숯처럼 어두운 시간의 응결성을 보여주었고 가발을 제작하기 위한 표본 드로잉은 낯설고 괴이했다. 왼발 혹은 오른발을 위해 남겨두었던 표본용 신발들은 45.5×35.5cm 크기의 서른두 개 액자에 넣어서 전시했다. 그런데 그 액자라는 것도 낡고 오래된 흔적들의 실체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들이어서 봄의 지하공간이 풍기는 민낯의 살풍경 속으로 싹 달라붙어 있었다. 왜 그는 신발들을 검은벌레라고 했을까? 언 듯 검은 신발들은 딱정벌레목 사슴벌레과의 곤충들이나 개미과의 곤충을 닮았다. 그러나 나는 한 짝씩만 남은 그 검은 신발들에서 시간의 검은 홀로 사라져 버린 우리 산업화의 근대성을 떠 올린다. 1970년대의 경제를 일으켰던 가발산업은 또 어떤가? 김수철은 폐기된 근대성의 흔적들에서 여전히 유령처럼 겉도는 근대의 살풍경을 채집했던 것이리라.

박지현

박지현의 <빛무늬>를 본 순간 처음 떠올린 것은 어릴 적 보았던 문살이다. 전남 신안의 증도에서 자랐던 내 삶의 기억에는 호롱불에 내비치는 문살 그림자 이미지가 참 많다. 대나무를 쪼개서 X자로 엮어 만든 문살에 한지를 발랐는데 손잡이 옆으로 마른 꽃을 눌러 붙이거나 혹은 대나무 잎을 난 치듯 붙인 것이 많았다. 또 한지 한 겹에 다시 두텁게 두 겹 세 겹을 붙일 때는 똑 같은 한지여도 문양을 오려서 붙이곤 했다. 그러면 낮에는 방에서 보는 문살의 이미지가 고왔고 밤에는 밖에서 보는 문살이 예뻤다. 박지현의 <빛무늬>는 그런 옛 문살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한국화의 배접방식을 원용해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를 덧붙였다. 어떤 형상들이 겹겹이 붙여지면서 한지는 단지 한 장의 종이가 아니라 형상을 품고 있는 따듯한 대지가 되었다. 이런 그의 작품에 빛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다. 빛은 대지가 품고 있는 형상을 틔워냈다. 전시공간에서 그의 작품들은 아름답고 따듯했다. 마치 생명이 움트듯 한지 속에 숨은 형상들이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임정은

임정은의 작품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전시장에서 만나는 그의 작품은 무수한 의자들을 그려놓은 의자회화일 뿐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어떤 생각들을 그 회화에 심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단순히 의자회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주 찬찬히 그 그림들을 살폈다. 그가 그린 의자들은 똑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어떤 주인들과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낸 흔적들이 역력했다. 게다가 의자들의 배경은 그 의자가 있었던 자리 혹은 그 의자가 품었던 시간들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의자들은 모두 주인 없이, 그 스스로 의자의 초상이 되고 있는 점도 독특했다. 그는 이 작품들의 개념을 作名: nameing’이라고 했다. 작명, 즉 이름을 붙인다. 무슨 뜻일까? 의자는 의자가 살았던 삶의 리얼리티를 살짝 빼 놓으면 곧장 다른 상상력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의자는 노동의 현실만이 아니라 초현실의 세계로 이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존재의 유형에 따라서는 관계를 지향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고독이 되기도 한다. 의자는 의자만의 존재로서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갖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임정은의 의자는 리얼리티와 초리얼리티의 무명씨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