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해 묻다!
-이지훈 <틀안에서의 무감각> 展

                                                                                                                               충북대 연구교수
                                                                                                                                           -정재훈

 

행궁마을커뮤니티 아트센터 1,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는 무렵에 나는 젊은 작가 이지훈의 틀 안에서의 무감각을 만났다. 어둑함이 차분히 가라앉은 전시 공간에 콘크리트 벽이 내품는 습한 냉기까지 더해져, 마치 동굴에 들어 온 듯한 느낌을 주었던 그곳. 텅 빈 공간에 홀로 진입한 나는 마치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처음 발견한 스페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데 사우뚜올라가 그랬을 법하게 숨소리도 죽여 가며 작품 곁으로 다가갔다.

우선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존엄성을 부위별로 팝니다였다. 분절된 신체와 초라한 나무 상자. 신체 부위는 각각 가격이 매겨진 채 관을 연상시키는 직사각형의 나무상자 안에 가지런히 담겨져 있다. 작품을 통해 작가는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재화가 되어 버린 신체를 통해 인간성의 죽음을 선언하고, 물질문명을 꼬집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누르지 마세요에서 공부하는 로봇은 불을 켜고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뇌를 쥐어짜며 문제를 풀고 있는 자그마한 공책에는 “1+1=2 Why?” 라고 적혀있다. ‘안에서 답을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생기를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과 같은 작품이다. 다른 편에 설치된 Workaholic은 화장실의 변기위에 점잖게 앉아있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얀 셔츠에 잘 메여진 넥타이. 하지만 얼굴도 머리도 없다.

좌우대칭적인 구조를 통해 단순하지만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조형을 추구하던 작가는 Le-pli연작을 통해 미적 도발을 감행한다. 외계의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작품들. 물론 주름은 이미 존엄성을 부위별로 팝니다더 이상 누르지 마세요뇌 주름을 통해 활용되기도 했다. 작가의 내면, 무의식의 세계를 정교하게 도려내었지만, Le-pli 1Le-pli 2은 여전히 눌려 있고, 갇혀 있는 모습이다. 미적 신선함을 꾀하려는 작가의 시도 가운데, 작가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언뜻 공중에 매달린 나무 감옥 같지만, 자세히 보면 천정을 항해 세워진 나무 계단 같아 보이기도 한 이상의 길을 틀에 가두지 않게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어렴풋한 기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이지훈의 작품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생존을 위해 하나의 존재방식이 되어버린 학습과 노동. 문제는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삶의 조건 때문에 우리 모두 개인의 취향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부하는 기계’, ‘일하는 로봇이 되고 있다는 것. 무엇을 위해, (Why?)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고깃덩이 마냥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극단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한 도발적인 이미지는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관람객에게 던진다.

작가는 해부학적 정교함보다는 SF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마치 외계의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창조해 내기도, 투박한 로봇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나무라는 재료가 가져다주는 따스함의 이미지는 냉혹한 현실로 교체되었다. 죽음, 갇힘, , 그리고 그 가운데 십자가의 발견은 작가가 봉착한 어떤 부조리와 같다. 종교적 숭고함은 상실한 채 평범하고 일상적인 오브제가 되어 버린 무력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배설이라는 본능과 넥타이라는 외형적 체면, 외형과 내면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은 고요하기에 더욱 치열해 보인다.

틀 안에서의 무감각은 작가 이지훈이 일상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비정상적 요소를 드러내는 미적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래선지, 작품 속의 개인은 억압받고 눌려 있는 무기력한 존재다. 부활의 상징인 빈 십자가. 부활을 위해 죽음은 필연적 조건이건만, 이지훈의 작품 뒤엔 부활에 대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에 대한 고민과 연민만이 있을 뿐이다. 젊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딛고 있는 세상의 진면목임은 부인할 도리가 없다. 작가가 막 뛰쳐나온 작은 을 철저히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또 그 꿈을 작품 속에 담아내어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