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산수_낙원을 그리다
-박형주의 <Om산수_낙원을 그리다>

                                                                                                                                   미술평론가
                                                                                                                                         -김종길

 

그의 <植心日>을 풀면 마음 심는 날이라는 뜻일 터. 마음을 심는다니 어디에? ? 어떻게?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 나무 심는 것이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려는 의도라 할 때, 마음을 심는 것은 그 마음이 또한 민둥 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일 터. 나무하나 없는 산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 는가? 광막한 광야의 사막이나 메마른 초원의 산과 들을. 동일하게 마 음이 없는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마음이 없으니 공 심(空心)? 공심이니 불심(佛心)?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불교철학에서 말 하는 깨달음의 공심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마음 심는 날은 역설 적이게도 카오스의 마음공간에서 코스모스의 마음공간을 확보하는 것 이다. 혼돈으로 가득한 마음폭풍의 중심에 고요한 폭풍의 눈처럼, 고요 한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의 그림들은 그의 사유보다 뒤에 있다. 그는 그림을 앞세워서 뜻을 부풀리지 않는다. ‘식심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그가 그려야 할 그림의 뜻을 먼저 사유한 뒤, 흰 화면의 공간을 구성한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가 그림을 먼저 사유했다면 그의 그림들은 뜻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 보는 이들에게 은 완결된 그림들이 품고 있는 조용한 이미지 언어다. 그의 그림들은 마치 코드 뽑힌 스피커처럼 어떤 소리도 웅웅거리지 않고 고요하다. 좀 더 가까이, 그 그림들 속으로 시선을 넣어서 그림 속을 걸어 다니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음악이 흐르지만, 불현 듯 그림 밖으로 뛰쳐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림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이다.

그 침묵의 언어는 ‘yoga’ 연작에서 집대성된다. 그는 친히 그 그림 속에서 유영하듯 요가를 펼친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꺾어서 산수의 부분들이 그러하듯 한 덩어리의 섬이 되고 나무가 된다. 그런데 그 섬과 나무의 몸이 그림 속에서는 그림자다. 아니,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것은 그의 몸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고, <#yoga No.2>에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듯이 그 몸은 그림자로 존재한다. 몸과 산수는 합일되지 못하는 이질감으로 충만하다. ‘식심일에서 그는 산수로부터 일정한 경계를 둘레 짓고 앉았다. <#yoga No.3>에서 그는 완전한 섬이다. 뒤로 물러난 산수는 구름처럼 버섯처럼 물결처럼 부유한다.

청록산수는 언 듯 보기에 옛 산수화를 연상시키지만, 그 연상의 실체는 사실 그림 속 주인공의 심리적 풍경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심리적 풍경. 그러니 그 풍경은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다. 어디에도는 오직 그림 속 주인공의 마음에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저 마음들의 산수풍경이 지시하는 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식심일에서 카오스의 마음공간을 비집고 들어앉은 코스모스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그것은 고요한 마음의 눈이고 아무 말 없는 침묵의 공간이라고도 했다. 과연? 폭풍의 눈은 고요하나 가장 잔혹한 카오스의 실체다. 언 듯 그림 속은 그림 밖에서 고요하나 스피커가 연결 된 순간 스피커는 요란하게 작동할지 모른다. 자연미술가 김해심이 자연에서 쾌적한 공포를 보았듯이, 나는 지금 박형주의 ‘Om산수에서 고요한 폭풍을 보는 것이다. , 그러니 그는 옴마니반메 훔의 을 옴옴옴 거리며, 청록산수를 싹틔우고 훌쩍 자신의 자취를 새겨두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림 속을 한참이나 헤매고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