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명의 얼룩말과 슬픔을 위한 향연

이 현

   미술품을 사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작가에게 직접 연락하거나, 갤러리건, 아트페어건 들어가 사고 싶은 작품을 고른 후 값을 내면 된다. 하지만 구매하는 과정이 단순하다는 것과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의 범주가 넓다는 건 별개의 일일 것이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소비하는 일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슈퍼마켓에 식료품을 사러 가거나 세면도구, 전기 기구가 필요해서 가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대다수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며, 여기에서 어려움이나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미술품을 구매하는 일은 어떠한가. 누구나 작품을 살 수 있지만, 아무나 작품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빈약한 미술교육과 미술은 부유층이 향유하는 문화라는 인식 탓에, 평소 미술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사람은 미술품 구매가 힘든 것은 물론, 전시장에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 시장에서 거래가 성립되는 작품 대부분은 미술계에 지반을 탄탄히 잡아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거니와 그마저도 미술 시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집단 중심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소위 일반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미술품을 접하고 그것들을 구매할 수 있는 장은 매우 좁을 뿐이다.

  Project ZEBRA는 그러니까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일반인과 대학생을 위한 아트 페어’라는 주제로 대안공간 눈[예술공간 봄]에서 한 달간 열린 이 전시는 몇 개의 의문에서 촉발했다. “예술 작품은 돈 많은 사람들만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예술 작품은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등, 상품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민(전자)부터 예술의 존재 이유(후자)까지를 아우르며.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진 공간에서 참여 작가 116명은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를 점유하며 작품을 배치하고, 그 옆에 짤막한 자기소개서도 붙이는 등 자유롭게 전시에 임했다. 아직은 작가라는 명칭도 어색할 정도로 그들이 작업을 오랜 기간 해온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이 전시가 목표한 것이 그들이 얼마나 잘 그렸는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은가. 이 전시가 단순히 아트페어 축소판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형식은 아트페어일지라도, 기존의 아트페어가 미술품 거래를 주목적으로 삼는 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관심사는 무엇이고 그것을 작품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등. 그들이 이 전시를 통해 얻은 것은 비단 관객에게 자신들을 소개하는 기회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작업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자각하고 고민했을 것이며,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의 존재 이유란 바로 이 지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일반인에겐 예술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을, 학생에겐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주는 이 전시가 비추는 현실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슬프다. 그곳에는 여전히 일반인이 미술품에 부담 없이 접근하기는 힘들다는 인식의 경계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이 자립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전공을 살려 돈벌이하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현실이 있다. 미술을 하고 싶고, 그곳에 꿈이 있어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이 전시에 참여했다. 하지만 네 꿈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 자리에서 기껏 손바닥만 한 종이에 너를 소개하고 있느냐고, 전시의 이면은 말한다. 게다가 전시가 끝난 후는 또 어떠한가. 팔린 작품은 제외하고 남은 작품을 다시 집이든 작업실이든 가져와 구석에 쌓아두면서 느낄 허함. 그 뒤에 남아있는 기약 없는 그리기, 전공에 회의감, 방황, 무의미, 불안. 불행하게도, 이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확언해주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오직 확언할 수 있다. 그림으로만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오래전에 종언을 고했고 중단 없이 그림을 그리는 일조차 힘들는지 모른다. 이미 밖이어서, 벗어날 수도 없다.

   항시 포식자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룩말은 무리생활을 택했다. 무리 지어 모여 있으면 몸의 얼룩 덕분에 포식자에게 덩치가 큰 생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제목에 얼룩말(Zebra)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 있다. 외부에는 무서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으니 한 데 뭉쳐 힘을 모아보자, 고. 무리 짓고 있는 얼룩말의 무늬는 얼룩말이 강자가 아니라 약자라는 증거이듯이, 이 전시가 직시하는 것 또한 결국은 예비 작가의 무력함이겠지만, 무기력이 곧 무능력을 뜻하진 않지 않은가. 얼룩말은 무늬를 이용해 생존 능력을 기를 줄 알고, 이 전시는 현실을 비춤으로써 예비 작가에게 그 비껴갈 수 없는 현실로 나아갈 궁리를 모색할 기회를 준다. 궁리한다고 해서, 당장에 현실이 호락호락하게 변모하거나 굴곡 없는 길을 터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일시적으로나마 도전해본 시간도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없음’은 도무지 가질 수가 없는,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는, ‘있음’의 힘이다. 모든 변화는 무언가 있다는 데에서부터 조금씩 시작된다.

   물론, 슈퍼마켓에서 상품을 소비하듯이 미술품을 구매할 수는 없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 상품들에 기울이는 관심의 절반이라도 미술에 대해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반인이 문화를 폭넓게 향유하기 위해서, 예비 작가들을 위해서, 그리고 윤택한 문화 환경을 위해서.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미술교육의 개선이나 문화사업 지원의 확대와 같은 거시적인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이 전시와 같이 미술계에서 소외당하던 계층을 위한 프로그램도 늘어나야만 한다. 이벤트성이 아니고, 더 탄탄하고 깊어진다는 전제하라면 만연해져도 좋지 않은가. 전시가 끝난 후 현실이, 다시 지겨운 일상이 찾아오면 또 불안해질 테지만, 그러나 그때서야 시작도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써. 투표권의 흔적을 입에 물고 전시장 곳곳을 누비던 개미처럼, 각자의 권리, 능력은 아직은 전시장 내에서 머물지만, 언젠가는 외부와 연결된 구멍을 통해 밖으로,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 향방을 찾기 위하여, Project ZEBRA 향연 또한 다시, 돌아올 것이다.